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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4. 09:00 - 독거노인

<Following the Equator>


마크트웨인이 쓴 <톰소여의 모험>은 책으로 읽지 않아도 만화로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어서 우리세대에는 익히 익숙한 소설이다. 전형적인 미국식 익살과 재치와 모험담이 있어서, 어릴적에 느끼는 어떤 모험심에 환상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책이 아니었을까 한다. 아마 전형적인 미국식 해학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런 해학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작가의 능력일 것이다. 물론 그런 작가의 능력이 여행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는 호주로 가는 중간 기착지의 섬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원주민들의 역사를 언급한다. 원주민들이 식민지화되면서 유럽인들에게 의해서 그들만의 영토에서 쫓겨나 몰락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혹은 연민과 풍자와 비꼼은 그가 가지는 문명과 비문명에 대한 19세기의 시각이 그대로 들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원주민들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자신들의 통치 방식만에 익숙해진채 외부의 충격에 대응할 능력 자체가 없었던 상황이었고, 유럽인들은 그들의 권력과 힘으로 그들을 몰락 시킨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권력과 힘을 단순히 문명이라고 치부한다면 그들에게 발견되어진 구세계는 지금 우리가 부르는 문명을 한번도 가진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의 탁월한 이야기꾼 기질을 발휘해서 그들의 비참한 영락을 잘 묘사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깊은 이야기는 진행될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인도를 가기전 잠깐 들른 실론 섬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섬이라는 것만 잠깐 언급하고 말아서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된다. 그가 여행할 당시의 실론이나 현재의 스리랑카나 여행지로서 크게 환영받고 있는 곳은 아니지만 실제 방분한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언급 안할 수 없게 만드는 곳이다. 아마 그가 진정 깊은 곳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기엔 머문 시간이 너무 짧았을 것이다.


마크트웨인이 호주만큼 긴 시간과 여행기의 긴 장문의 글을 실은 곳이 인도다. 특히 인도에 존재했던 비밀스레 존재했다가 결국 꼬리가 잡혀 폭로된 노상강도 갱단의 존재와 바라나시의 경건함 속에 인도인들이 신으로 모시는 현자를 만나서 인도의 경외감을 느낀다. 인도의 다양성과 긴 역사속에서 형성된 그들만의 정체성은 침략자로서 서 있는 유럽인들이 가질 수 없는 인도인들만의 유일성임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마크트웨인이 럭나우를 언급하며 세포이 반란으로 인해서 발생한 잔인한 학살, 영국인들의 저항과 그 속에서 저항한 영국인들의 처참함만을 언급하며 영국 지배의 현실을 끝맺는다. 과연 이것이 그가 세포이 반란으로 인한 희생당한 영국인들에게 자신이 받치는 헌사인가 아니면 그가 생략한 세포이 반란에 대한 영국인들의 복수가 가져온 인도인들의 희생의 무시 혹은 당연한 댓라로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다.


폴 서루의 여행기를 읽다 느낀 점은 그의 여행기의 전형이 마크트웨인의 책을 모범으로 삼은게 아닐까 생각된다. 자신이 방문하는 지역이나 국가에 대해서 책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고 혹은 매체를 통해서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며, 자신의 느낀점을 감성적 차원에서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통해서 다시금 바라보는 감성적 형태. 서양 여행기 작가들에게 마크트웨인이나 키플링의 여행기는 자신들이 표준으로 삼아야할 텍스트와 같은 존재일지 모르겠다. 그만큼 오래된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지만 여행을 통해서 느끼는 설레임과 생각의 깊이를 반영한 여행은 진지한 여행가라면 항상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