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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7. 10:09 - 독거노인

<DON QUIXOTE>


돈키호테에 대한 막연한 이야기들은 그가 기사도에 미쳐서 풍차에 돌진하는 광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사랑하는 여인, 기사도 정신을 완성시켜줄 대상으로서 여인을 상정하고 그 여인에게 사랑을 바친다. 그 여인은 그냥 시골뜨기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다 읽고 나니 드는 생각은 과연 그를 단순히 기사도에 미친 광인으로만 취급 해야하는가이다. 분명 그가 사는 시대에 적절하지 못한 부적응자임에는 분명하다. 시대적 가치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지 아니면 그런 시대적 가치보다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가치관에 몰입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받치려는 열정에 투영된 광인일 것이다. 물론 그런 몰입은 어느 시대건 당시의 사회적 편견과 몰이해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과잉된 자의식과 광기는 비웃음과 몰매로 그 댓가를 치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댓가보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아마도 돈키호테 자신이 향하는 지점에 있는 환상을 이용해서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자신들의 무료한 일상의 오락거리로 전락시킨 귀족들의 모습이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약자에 대한 경멸과 멸시 그리고 사취적 성향은 돈키호테의 2부에서 나오는 공작과 군주의 사기행각이다. 비록 돈키호테가 일반 서민들에게는 광인 혹은 자신들의 일상을 침범하는 침입자로 비춰져서 그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뭇매를 던졌지만 그를 향한 인간적인 적의를 들어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들의 일상에 나타난 광기를 자신들의 놀이거리로 전락시켜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역사적 일 혹은 환상속에 존재하는 일들이 현재에 재현되고 있는 것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오락거리로 전락시킴에 있어서 인간적인 모멸감을 무시한채 펼치는 하나의 희극판을 만든 것이다.

작가가 들어내는 희극적 요소들은 어쩌면 인간 이면에 존재하는 얇팍한 위선의 베일을 벗기고 그 속에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인간적인 약한 면을 끌어내어 악용하고자 하는 유혹 앞에 놓인 인간들이 벌이는 풍자극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광대로 산쵸가 있다. 그는 돈키호테의 광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 광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더 민감하게 유혹되어서 자신의 눈을 가리고 돈키호테를 따르며 그 주인의 말과 행동에 희극적 요소들을 첨가하는 역활을 한다. 그런 속성이 뻔히 보이는 기사도 수업의 환상과 허위의 결과에 탐닉하여 너무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돈키호테의 시종이 되었지만 그의 역활은 주인의 모든 명령에 목숨을 걸고 신의와 대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이상적인 시종의 모습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약한 면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돈키호테에게 반항하며 비웃음과 비난을 던지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그는 돈키호테가 쫓고 있는 환상이 결코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그 환상에 따라오는 자신의 결과물을 끊임없이 탐하는 연약한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가 곤궁속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알면서 발을 내딛는 시종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몰매를 면치 못한다.

샨쵸가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아마 가장 인간적이고 친밀감을 주는 이유도 이런 연약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까운건 작가가 3부로 산쵸의 모험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결국 완성되지 못하고 끝나 버린 점이다.


<돈키호테>에는 단순히 돈키호테의 이야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소설이 쓰이던 당시의 시대적인 로맨스를 가득 담고 있다. 세르반테스가 희극 작가로서 성공하지 못하고 군인으로써 아랍인들에게 포로가 되어 보석금을 내지 못하고 오랜 포로 생활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겪었던 경험담이 그대로 소설 속에 녹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로맨스가 들어 있고, 사랑을 농낙하며 희대의 바람둥이가 신실한 애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그녀를 결국 자신의 부인으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들은 소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의 이런 배경 외에도 그는 돈키호테가 침상에서 그의 기사도 수업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서 후회를 하면서 미궁으로부터 빠져나와 올바른 세상 속으로 환속했음을 선언한다. 이것은 교구목사의 입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비난 혹은 비판하던 기사도 문학의 허상과 환상을 다시금 확인하는 부분일 것이다.


근대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장이였다면 과연 중세는 어떤 존재였을까. 작가가 창조한 희극적인 샨초도 기사도에 몰입된 돈키호테도 사실은 중세의 기사도 문학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가 중간에 그토록 절절한 사랑을 읊었던 소네타도 중세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들려주던 기사 문학과 연애소설이 없었다면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그런 사랑의 소네타를 부를 수 있었을까. 결국 앞선 시대를 부정하고 조롱할 수는 있어도 결코 그 앞선 시대의 모습은 사라지거나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밟고 서 있는 땅과 같은 존재가 앞선 시대의 정신이고 그런 앞선 시대의 정신은 어두운 중세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길을 만들어 르네상스 시대로 이어온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