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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21. 09:00 - 독거노인

<조선의 탐식가들>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먹을려고 애써서는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 보는 일에 정력을 소비할 뿐이다.

- 정약용 : <조선의 탐식가들> 中


고려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의 지배하에서 점차 북방민족의 영향을 받아서 육식이 다시 살아나는 형상이었다. 백정은 북방에서 유입된 유목민을 조선에서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들에서 도살권을 주고 정착 시킨 결과라고 한다.


조선에는 성균관에 종속된 반촌이 있었다.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유학생들을 위한 하층민 집단이었다. 이들에게 성균관의 관리와 유생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역활을 지탱하기 위해서 도살권을 주었다고 한다. 이들이 도축에 관한 기술을 어떻게 전수 받았을까 궁금하다. 아니면 백정 집단이 반촌을 이루고 성균관에 종속된 것인지. 어떤 책에서는 단순히 백정 집단이라고만 기술하고 있지만, 백정이 반촌으로 유입된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 사회는 농경 사회였고, 노동력이 많이 드는 벼재배에는 인력뿐만 아니라 소의 동원도 필수적이었고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소의 도살에 대해서 금지령이 항상 존재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질적인 소고기에 대한 요구는 항상 존재했고 금지령에 따르는 처벌보다는 도축으로 발생하는 이익이 훨씬 크기 때문에 결국 밀도살이 성행했고, 불법적인 도축을 하는 집단이 항상 존재했다. 물론 농민들은 조선시대 내내 궁핍한 생활, 단순히 하루 두끼만을 먹으면서 간신히 생명 유지에 필요한 임계점에서 살았지만, 부를 축척한 양반이나 중인 계급에서는 거대한 육식에 대한 욕구 존재했다고 봐야 하겠다.


농민들만 생명 유지의 임계점에서 허덕였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정권에서 밀려난 유배자들은 생계 유지에 많은 고생을 했던 것 같다. 특히, 정약용은 자신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궁핍함에 몰려 있었고 손수 텃밭을 가꾸며 자식들에게도 청빈함을 강조한 인물로 나온다. 만약 정약용이 정권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다면 그도 미식가의 기질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추측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학자들에게는 탐식이나 미식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존재했고, 탐욕을 절제하고 청빈한 이미지가 유학자로서의 기본 자질임을 자랑으로 생각했고, 실제 내면이 어떻든 그들은 그런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수백년동안 이델올러지 형성에 노력했던 지배 계층이다. 그들이 당파 싸움에서 밀려 탄핵을 받을 때 가장 많이 공격 받고 사가들이 그들의 결점으로 역사 기록에 남긴 것들이 탐욕과 탐식이다.


탐식과 탐욕은 그만큼 조선시대에 들어내기 힘든 욕망이다. 그런 시대를 살던 그들에게 맛에 대한, 음식에 대한 기록은 옛 성현들이 칭찬했던 음식들에 대한 이미지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특히 체면과 겉치례를 일상적인 자신들의 이미지로 덮고 살던 양반들이 내면에 일던 욕구를 자제하는 것 그리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아마도 죄악시 되는 욕망들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