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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28. 09:00 - 독거노인

<조선의 음식문화>


조선전기의 수라상은 7기(7첩)였다. 이는 정조 때의 혜경궁 홍씨 환갑잔치에 대한 남아 있는 기록을 근거로, 가장 화려했던 상차림임을 감안한다면 궁에서 일상적인 상차림은 7첩을 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환갑잔치 하루 식사 횟수는 7번이었다. 궁중에서는 최대 하루 7끼의 식사를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주요 식사를 7번 한 것이 아니고 2번의 간식(혹은 술상)이 포함된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온 사신 접대는 왕과 동일한 대우를 해야 했기 때문에 7끼의 식사를 제공했다.

임진왜란 이후, 삼정이 문란해지고 신분체제가 해이 해지면서 양반들의 상차림은 점차 화려해졌다. 또한 중인들 중 부를 축적한 이들이 많이 등장함으로써 이들은 신분적 속박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상차림을 받았다. 추정으로는 부유한 이들은 궁중에서와 같이 7끼의 식사를 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게다가 궁중이나 양반들의 경우는 먹는 것에 대한 금기가 있었고, 음식에 대해서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신분상의 제약에서 자유로웠던 중인들은 외국 음식(중국이나 일본 음식)을 적극 수용하였고, 자신들이 축적한 부를 과시하는 데 꺼리낌이 없었고 음식에도 그 부를 퍼 부었다.

점심은 간단히 먹는다라는 중국말에서 유래되어 변형된 것이다. 조선의 일반 농민들이나 노비들은 하루 2끼의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고공살이를 하는 경우에 주인집으로부터 식사를 제공받았다. 이를 생각해 볼 때 간단히 먹는다는 점심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낮에 식사를 하기 힘들었던 일반 농민이나 노비들에게 보편적인 간식이나 참이 식사의 개념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라 추측이 된다.

조선의 밥상은 유고의 영향을 받아, 음양오행설에 따라서 밥과 반찬을 구성하였다. 부유한 이들은 하루 7번의 식사를 했다. 음식은 몸안의 기를 다스리기 위해 약으로 먹었다-약선개념.

양념은 약과 염에서 나온 말이다. 녹두로 조리할 때 양념을 넣는 다는 것은 녹두를 평(平)하게 만드는 약인 생강, 후추와 간을 위해서 염인 소금을 넣어준다는 함축적인 의미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자연(천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천체(신성세계)는 저승세계로서 조상은 신성한 존재이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산과 결실을 하게 해 주는 존재이다. 곧 농경사회의 안녕을 위해서는 신께 제사를 지내야 했고, 그 신은 자신들의 조상이 속하는 세계다. 조선에는 수 많은 신들이 존재했고, 유교적 의미의 제사 뿐만 아니라 일반 민간 신앙 속에 존재하는 신들께도 제사를 지냈으니, 조선의 제사의 발달은 상차림에 올리는 음식에 필요한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서 상당한 도살이 필요했고, 장사의 발달로 주막과 객주집의 번성은 탕반 음식의 발달을 가져왔다.

<한국지> '소를 외국에 수출할 정도로 가축이 많은데, 소는 신장과 역량이 대단히 훌륭하다'.

 <조선실정> '조선인의 체격은 대개 우량하다. 키가 크고 골격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족이 이러한 체질을 가지게 된 것은 일반의 풍속으로서 육식을 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어육은 말할 것도 없고 소고기, 돼지고기를 많이 먹고 있는데, 도저히 일본 민족에 비할 바가 아니며 옛날부터 조선의 집단지에서는 어느 곳에도 상당의 도살장이 있다.'


일제의 의한 조선실정 기록을 보면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초기부터 소고기에 대한 요구는 조선말기까지 이어졌고, 조정에서는 소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 소 도살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지만 이는 유명무실한 법력이었다. 우역이 발생하는 동안에도 소고기에 대한 요구와 밀도살은 이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일반 민중들은 하루 2끼 밖에 식사를 할 수 없는 가난한 상태였는 데 그 많은 고기들은 누가 소비했을까 의문이 든다. 위의 기록이 기술하고 있는 조선말기(일제시대)에는 비숍 여사가 조선을 여행하면 농민들의 삶에 대한 비참함을 기록하던 때이다. 소고기를 대량 소비할 만큼 부를 이룬 계층과 조선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가난한 농민이 존재했다면, 조선말기는 현재처럼 부의 편중화가 심화된 경제 상태였다는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