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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12. 09:00 - 독거노인

茶를 마시다



나의 茶 생활은 오래 전 중국 여행을 하면서 사온 이름 모를 차를 마시면서부터다. 시안에서 꽤 비싸게 주고 산 차였지만 이름도 모르고 맛도 모른 채 허비해 버린 그런 차였다. 물론 그 시절 가난했던 여행자로서 그렇게 비싼 차를 샀던 것은 오래전 하동쪽에 놀러갔다가 어느 이름 모를 찻집에서 마셨던 녹차의 맛 때문이었다. 녹차라고 하면 티백이 전부였던 내게 그 차 맛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향과 달콤한 맛이 온 입안을 감싸고 돌 때 그 행복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녹차를 다시 만날 수 없었고, 몇번의 인터넷 주문으로 마신 녹차의 맛에 더 더욱 실망해 버려서 결국 녹차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몇십만원 하는 녹차들이 있었지만 내 손이 닿기에는 너무 먼 곳에 있는 것들이었다.


나이가 들고 커피에 대한 욕심에 시간과 돈을 허비하고 나니 어느 덧 보이차로 넘어가는 순간이 왔다. 딱히 비싼 보이차를 마실 생각도 없었고 그저 회사에서 마시는 음료수로서 가장 적당한 것들을 찾다보니 나도 중국 서민들처럼 몇천원하는 싸구려 보이차들을 주문하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싸구려 보이차를 마시다보니 확실히 내 취향을 깨닫게 되었다.


보이차도 제대로 맛을 내기 시작할려면 최소 20만원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던데, 내게는 만원정도만 넘으면 그럭저럭 물 대신 마실 수 있는 충분한 맛이다. 그리고 스테인레스 거름망에 한컵 가득 우려 마시면 회사에서 한나절이 간다. 그러던 중 한동안 빠져 있던 <효리네 민박>에서 다구들을 갖추고 보이차를 마시는 장면을 보니 내 안에 있던 욕구들이 한데 뭉쳐서 최소한의 장비는 갖추고 마시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주말 아침이면 일어나자마자 물을 끓이고 개완에 차를 넣어 우리고 숙우에 따라 한잔씩 茶를 마시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온도가 점점 떨어지고 집안이 점점 더 써늘해 질수록 차 한잔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온몸을 뎁히고 기운을 돋아 준다. 이 한잔의 차 때문에 주말 아침이 기다려진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뭔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즐긴다는 생각을 하지만 나의 식탐은 이런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아침에 마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마셔버려야 한다는 듯이 들이 붓는다. 식탐을 줄이려 차를 즐기지만 결국은 차마저도 나의 식탐에서는 벗어나질 못한다. 자신에 대한 욕심으로 한가득인 사람은 무엇을 즐기던 그 욕구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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