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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14. 09:00 - 독거노인

<Views on KOREAN Social History>


내가 기억하는 90년대의 한국 근현대사는 마르크시즘에 기반한 민족주의 성향이 휘몰아치던 시기였다. 그런 환경이 탄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독재지배 체제하에서 현실을 부정하고 민주적 성장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이 되어준 것은 마르크시즘과 민족주의라는 장양분이었다. 특히, 70년대의 독재치하 경제발전은 그 독재현실에서 이룩한 경제성장을 부정하고 싶던 이들에게 역사적 가정이 필요했었다. 그런 대안으로 찾은 것이 내재적 발전론일 것이다. 가난한 대한민국이 세계적 기적을 이룩한 것은 역사적으로 추동력을 가진 내재된 힘이었다는 이론은 분명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문제는 이런 역사적 가정이 가지는 난점, 즉 실행될 수 없는 백일몽과 같은 것이다.


한국의 역사가들은 백남은의 역사관를 이어 받아서 내재적 발전론을 수용하고 있다. 그의 관점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인구의 증가와 함께 상업이 발전하고 상품의 유통이 증가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지속적으로 조선이 발전한다면 결국 자본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않았을까 가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의 이론(백남은은 추론에 의한 내재적 발전론을 내세웠다)을 검증하기 위해서 역사적 증거 찾기에 혈안이 되었었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상업발전과 화폐 유통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18,19세기 소농들의 몰락은 많은 떠돌이들을 양산했을 것이고, 이들은 생계를 위해서 소작인이나 일용직으로 고용되었을 것이다. 이런 유랑 인구의 증가는 노비들로 더 이상 이익 증대를 기대할 수 없었던 양반들이 이들을 이용하여 지주제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강화된 지주제는 분명 곡물 생산량 증대(토지 집중에 따른 효과로)에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농서들이 많이 보급되면서 이앙법 및 퇴비에 대한 지식 보급이 보편화되고 이를 기반으로 생산량 증대에 많은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Palais 교수는 여기서 의문으로 남는 것은 과연 이런 잉여 곡물이 인구증가와 맞춰서 끝났는지, 아니면 인구증가 없이(조선 후기에는 유행병이 창궐하였다) 잉여산물로 남았는지 아직까지 미지수로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가장 큰 문제점은 동시기에 중국과 일본의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을 비교했을 때 조선이 현저하게 낮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조선의 농업이 발전했지만 그 생산력에 있어서 발전 단계가 어느정도까지 갈 수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잉여 산물이 유럽의 자본주의 이행단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공업적 투자로 전환이 되었야만 가능한 자본주의 발전이 조선사회에서는 이런 현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조선은 분명 장단점이 존재하는 국가였다. 조선 왕조가 궁극적 목표로 삼았던 것은 유교주의 이상국가였다. 조선은 이런 유교적 이상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농업의 잉여물은 재투자보다는 봉제사와 접빈객 접대에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고 결국 500년간이라는 장기간의 국가 지속성은 이런 목표에 접근하는 유교문화 국가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은 문치주의에 몰입한 결과 국방은 포기것과 진배 없다. 양반들과 같은 엘리트 계층이 유교적 문화를 기반으로 도덕적 우위에서 하층민들을 통치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유교적 수양과 실천을 중시하였고 하층민들은 생존의 근본인 농업에 충실하도록 관리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조선이 내재적 발전 가능성을 가진 국가로 발전해갔다고 보기 보다는 이런 유교적 문화 기반에 서 있는 국가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선이 노비사회였는지, 아니면 노비의 비율이 높았지만 조선의 노비들이 다른 나라의 노예들과는 다른 농노정도의 지위를 가지는 반자유인이었는지 논쟁이 있다. 한국에서 자신의 선조가 노비였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분명 미천한 신분으로써 여겨지는 노비였지만 노비에 대한 보상이나 노비제도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반성적 시각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조선사회를 노비제 사회로 보지 않고 그런 시각자체를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현재 문서상으로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통일 신라시대 인구의 10%정도, 조선 시대 18세기에는 30%정도가 노예였다. 발견된 문서중에 17세기 서울 외곽의 노비 비율은 70%까지 이르렀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서울의 특성상 많은 관료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공노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본다면 일반적인 특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다. 경상도 지역에서 발견된 호구대장에 나타난 노비 비율을 조사하면 30%정도가 노비였다고 파악된다. 이를 근거로 전국적인 비율을 고려한다면 조선은 노비제 사회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마르크시즘적 역사관이 설정한 근대로 이행하기 위한 봉건제의 필요성과 원시 노예사회에서만 존재하는 걸로 가정한 가운데 조선이 노예제 사회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맹아적 단계의 조선을 상정한다면 조선은 봉건적 발전 단계에 있어야 하며 노비들에 의해서 사회가 유지되기 보다는 자작농, 소작인, 농노에 의해서 유지되어야만 하는 사회인 것이다.  


마르크스적 시각에서 벗어난 또다른 시각으로 이영훈 교수의 노비에 대한 생각을 본다면, 다른 국가에 비해서 조선의 노예는 주인에 대한 종속성에서 좀 더 자유로운 상태였다는 것을 강조한다. 노예의 자유도가 다른 국가보다 높다고 노예를 재산으로 취급하고 노예 소유주에 대한 종속성 자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결국 통일신라의 노예비율 10%에서 고려를 거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노예 비율은 지속적으로 올라 30%까지 증가하였다고 가정하는 것과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역사적 숙제가 되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가지는 문제점은 민족주의가 심화될수록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편협한 시각속에 함몰되고 마는 것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자신의 테두리를 좁게 설정하고 혈통 순수주의를 부르짖게 되는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본이 식민지 건설에 맞춰서 조선의 낙후성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는 가정을 세운 그 역사관에 같은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 취약하고 흔들리기 쉬운 민조주의의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발전 단계를 서구 마르크시즘에 맞춰서 파악하다보면 다른 문화속에서 자신만의 문화형성 과정을 경험한 이들에게 강요된 서구적 시선속으로 역사를 억지로 떠밀어 넣는 결과를 낳게 된다. 과연 서구적 역사적 과정이 필연적인가. 인류 역사 진행이 과연 발전적인 과정을 겪은 것인가는 의문이 남는 부분이다. 역사는 여전히 진행형이고 현재의 관점에서,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글로벌화된 현재의 시각속에서 더 넓은 시각을 포기하고 하나의 길만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타인의 시각으로 자신을 이해하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James B. Palais 교수는 우리나라 역사가들이 바라보는 이런 달콤한 시각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관이 가지는 민족주의적 관점과 마르크시즘적 역사 이론의 차용을 좀 더 넓은 견지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넘어설때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조선의 역사가 더 넓게는 한국의 역사가 확장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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