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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15. 09:00 - 독거노인

<양반>


조선사회에서양반이라는 정의의 모호하다. 분명 고려말부터 문헌에 등장하는 단어이지만, 실제 양반이라는 집단,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엘리트 집단으로써의 그 실체와 정의는 정확하지 않다. 이런 양반이라는 단어는 조선의 법체계안에서 어떤 사회적 지위로써 주어진 것이 아닌,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단어로써 사용되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결국 양반이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습득되어야 하는, 통상적으로 인정받아야만 하는 모호한 사회적 계급이었던 것이다. 정의가 모호한 만큼 이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출신성분의 순수화를 강조하였고, 가문안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으면 그 사실은 평생 그리고 전세대에 걸쳐서 오점으로 남아 양반으로써 순수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양반 혈통에 대한 순수성의 전형적인 예가 오반동 김씨의 일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조선초 조선이 건국되면서 지방 향리들이 관계로 진출하고 이들이 다시 지방으로 돌아와 정착함으로써 조선의 양반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런 양반의 경제적 기반은 적극적인 개간을 통해서 농지를 확보하고 노비들을 확보함으로써 확립되었다. 농지 개간 자체가 인력과 자원이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고려말의 권벌들이 소유한 노비들을 통해서 미개척지로 남아 있던 땅들을 개간하고 농장을 확대한 것으로 개인적으로 추측한다. 이렇게 확장된 경제력을 기반으로 유교적 공부를 수행할 수 있는 경제력이 마련되었고 그들은 중앙정계로 진출하였을 것이다. 

  

고문서를 통해서 본 양반의 경제적 최전성기는 17세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8세기를 기점으로 소농화가 진전되고 양반들의 경제적 기반도 많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소농화가 인구의 증가와 함께 균등분배를 통한 상속으로 인해서 재산의 분할 때문에 발생한 현상인 것처럼 보인다. 이에 따라서 재산상속은 남자형제에게 주분배가 이루어지고 여자형제들은 점점 소외되어 간다-조선초 존재했던 처가살이 풍습도 같이 사라진다. 이 과정이 심화되면서 결국 장자상속 중심제도가 정착이 되어간다. 이런 현상은 경제적 원인이 주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반에게 봉제사와 접빈객 접대는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는 행위이며 양반으로써 정체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잣대였기 때문에 경제적 상황은 분명 중요한 요소였다.


족보는 조선초부터 작성되기 시작했지만, 혈족과 동족의식이 강화되고 유교적 형식이 보급되어 조선만의 유교적 경향이 강화된 18세기에 가장 많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 족보에는 자녀 모두를 연령순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여자들은 기록되지 않거나 남편의 이름이 기록되는 형식으로 바뀐다. 이는 유교화가 심화되면서 여성들의 지위가 하락하고 남자 중심, 장자 중심으로 가족제도가 재편되어간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족보는 양반 가문의 역사를 기록하는 기록물로써의 의미보다는 양반이라는 엘리트 의식을 강화하고 증명함으로써 작성 당시의 양반적 지위를 표시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물로써 이해될 수 있다. 유교화가 진전되고 혈족 중심 가족제도가 뿌리내리면서 일반 평민에게도 유교적 사상들이 반영되기 시작한다. 일반 인민들의 가정에서도 유교적 제사를 지내며 하층민들조차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평민들도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 후기 족보 간행이 늘기 시작하면서 지방의 향리층-이들은 양반의 모체가 된 집단이었으나 양반으로부터 계급적 차별을 받는 존재였다-들도 양반들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하였고, 그들도 양반과 같은 대우를 받기 원했다. 이들의 이런 목소리가 반영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향리들이 족보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조선초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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