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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28. 09:00 - 독거노인

<조선사회사 연구>


조선시대 양반이라는 특권층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존재하던 권력층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저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층은 존재하였으며, 단지 조선시대에 와서 그 이름이 양반이라고 불리게 된 것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결국 한반도에 성립된 국가는 그 기반을 계급 위에 세우고 나라가 바뀔때마다 권력층은 이름을 바꿔가면서 존재했다고 보고 있다. 고려말에 형성된 권력층은 조선이 개국하고도 변하지 않았으며 권력층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신진 세력이 유입되었지만 결코 조선을 이루고 있는 양반세력은 변하지 않았고 그들 양반의 권위는 조선이 임란을 겪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구체제를 해체할 때까지 존재했었다. 


이런 양반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 인정받는 신분이 아니었으며, 사회적으로 공인이 필요한 신분이었다. 따라서 양반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공인받기 위해서는 가문을 대표하는 현조가 존재해야 한다. 가문을 대표하는 현조란 결국 관리로 임명되어 그 명성을 얻거나 학자로서 명성을 얻어 널리 알려진 인물이어야 한다.


양반이라도 다 같은 양반이 아니었으며, 양반 사이에도 계급차가 존재했다. 모두가 인정하는 상급양반 집안은 전국적으로도 알려져 인정을 받았다. 양반들은 자신의 신분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혼인을 통해 자신들 보다 상층의 양반과 혈연을 맺거나 최소한 지위가 떨어지는 집안과의 혼인은 피하려 했다(이는 우반동 김씨가 자신의 딸 혼처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가 가진 재산은 분명 갑부급이었으나 양반 계층상으로는 하층에 속했으므로 자신의 한미한 가문보다는 좋은 가문을 찾으려 노력하는 모습과 쉽게 혼처를 구하지 못하는 과정이 나타나 있다). 


조선 시대 양반가의 혼맥은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는데,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전국적인 혼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기반은 중앙의 관료체제였다. 양반은 중앙의 관료체제를 통한 접촉으로 그 혼맥의 그물망을 전국적으로 퍼트렸던 것이다. 많은 양반들이 결혼 후 세거지를 처가가 존재하는 곳으로 이동을 많이 했고 이는 양반들의 새로운 파의 시조와 본관이 시작되는 기반이 되었다. 


양반의 자신의 가문이 몰락하지 않고 유지할려면 유학으로 명성을 얻거나 관계에 진출하도록 끊임 없이 노력해야 했다. 관계에 나가는 길은 음서제도도 있었지만 결국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관계로 진입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명문상으로 출신자격에 제한이 없었다. 서얼이나 일반 양반들이 응시하여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로 임용되었던 것이다. 물론 양민 이하는 응시할 수 없었다. 노비들은 인민이 아니라 재산으로써 송속과 양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응시 자격에 제한이 없었던 과거시험에 양반들만이 응시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은 10~20년 동안 학업을 진행하기 위해서 재정적 뒷받침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일반 양민들이 자식들을 공부 시킬 수 있는 기반이 없었으므로 응시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특히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대부분 임용(무과는 문과와 다르게 급제하고도 임용되지 않거나 임용될 때까지 긴 세월을 기다려야했다)되어 관리로 진출했지만 이들이 고위직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결국 가문의 배경이 중요시 되었다. 한미한 가문의 자제가 과거에 합격했다고 해서 중앙의 요직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서얼의 경우는 승진에 있어서 출신기반 때문에 제한을 많이 받았다. 


과거시험은 정기시와 비정기시가 있었는데, 비정기시는 서울에 살지 않는 양반들이 응시하기에는 힘들었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비정기시가 많아지는 현상은 수도에 기거하는 양반들-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방은 과서시행 소식과 원거리 이동등의 제약으로 비정기시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었다-의 세력강화를 하기 좋은 기반이 되었다. 


양반과 양민 모두 농업을 기반으로 자급자족하는 사회였다. 양반이라고 모두가 지주 계급은 아니었으며 몰락한 양반들도 다수 존재했다. 하지만 중앙 관계와 인연을 맺거나 학연으로 맺어진 양반들은 자급자족 시대에 인맥을 통해서 필요한 물품들을 주고 받으면서 호혜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그들의 생계가 다급할 때는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이런 인맥을 갖추지 못하고 닫힌 공동체 안에서 지방관이나 하층 관료들에게 갖은 수탈(특히 환곡에 의한 수탈)을 당하던 농민들은 재해나 흉년이 닥치면 자신의 생명을 잃거나 기아 선상에서 버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연줄은 양반이라는 신분이 주는 혜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양반이라는 신분이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양반으로써 인정받고 대우 받기 위해서는 접빈객 접대와 선영봉사, 학문 정신등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규모의 농장으로는 생계에 위협이 될 정도였다. 


조선시대 족보편찬은 양반 가문의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가문을 기록하는 방식이 족보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15~16세기에는 가승도, 팔고조도, 십세보, 십육조도 등이 존재했었다. 이들은 기록자인 자기(自我)를 중심으로 조상을 파악하도록 하는 기록물이다. 이에 반하여 족보는 기록 방식에 있어서 피라미드 형식으로 시조와 현조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형식이기 때문에 시조나 현조의 많은 수 많은 자손들 중에서 자신이 속한 세상을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조선시대에 사용되던 본적이라는 개념은 한국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중국에서도 본적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이는 실제 거주지를 지칭하는 개념이지 한국처럼 시조나 현조가 세거지에 들어온 곳을 가리키는 개념은 아니다. 한국의 본적 개념은 가문을 중시하는 동시에 문벌을 내세우기 위한 관습이다.


조선사회의 지속성은 계층간 유기적 상호작용에 기반하고 있다. 관과 민은 접촉할 일이 많지 않았으며 중앙집권적 정부 운영과는 대조적으로 각 지방은 지방자치제에 가깝게 운영되었다. 이는 닫힌 사회 혹은 고립 사회안에서 계층간 상호작용과 유대로 시스템을 유지하였다. 양반은 향약과 양반적 신분을 이용해서 지역 질서 유지와 하민 교화를 주도하였다. 이런 권력층에 속하는 양반들로 구성된 한국 씨족제도의 특징은 배타성과 반목성이다. 씨족간의 배타와 반복보다는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씨족간 반목, 배타성이 나타난다. 


조선 시대는 학연, 지연, 혈연이 중요 했다. 양반이라는 신분 자체가 그 배경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는 했지만 이 신분을 유지하고 더 위의 신분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이런 인맥들이 중요한 기반이었던 것인데, 이 학연, 지연, 혈연은 시대가 변하고 시스템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작동하는 체계인 것 같다. 게다가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조선을 세웠지만, 그들의 지지 기반을 새로이 다지기 보다는 이미 형성되어 있던 양반이라는 권력층을 흡수하여 조선을 개창하고 그들이 다시 자신들이 속하는 시스템을 안전한 권력 유지체계를 만들기 위해서 유교적 이념들을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시스템을 강화한 것은 마치 일제 시대가 끝나고 친일 청산을 포기한 집권층과 지금도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서 학연, 지연, 혈연으로 묶고 있는 대한민국의 상층은 어찌 닮은 판박이 같이 보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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