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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1. 09:00 - 독거노인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


한국의 민족주의 사상의 기원을 찾는다면 단연코 신채호의 저작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확립한 "민족"이라는 개념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저항의 코드로서 외세에 의한 굴종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단위체로서 형성되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민족"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강하게 갇혀 있는가를 본다면, 신채호가 남긴 민족의 망령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시기에 혹은 구한말 시기에 형성된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러지는 그 기반 자체가 약하다. 우리가 단군을 시조로 삼고 순수 혈통을 강조하는 숨막히는 역사는 그 이면에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 이념적 도구로서 만들어진 식민사관과 너무나 흡사한 이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다. 


일본이 서구의 시민사회의 탄생과 같이 만들어진 민족주의에 상응하기 위해서 "민족"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식민지 지식인들이 민족을 강조하면서 단결을 강조하였지만, 이에 상응하는 일본 식민지 당국도 내지화를 위해서 조선인들을 근대적 민족으로 각성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민족주의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농민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었다. 계급적 분화와 신분적 분화를 나타내는 다양한 단어가 존재했지만, 전체를 통털어 농민이라 아우르지 않았던 것이다. 농민은 식민지 시기에 민족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새롭게 발견되어진 것이다.

 

역사적 아이러니는 일제시기에 낡은 것으로 취급되어 퇴출되어야 한다고 강조되던 구관습이나 문화가 시대가 바뀌면서 민족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새롭게 발굴되고 보전되어야 하는 무형의 문화재로 탈바꿈한 것이다. 해방 후 무형문화재가 제정되면서 80% 이상이 농촌에 기반한 문화재였다. 식민지 시절 타파의 대상이 이제는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일제 점령기를 바라보는 이분법적 시각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단순히 근대에 대한 서구적 개념으로만 일제 식민지 시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근대화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외부로부터 강압에 의해서 근대적 시간과 공간 개념이 주입된다.

일제는 새롭게 점령한 조선에 대한 수치적 통계를 도입함으로써 주민 통제의 세밀화, 정교화 하였다. 이렇게 정교화된 통제 덕분에 조선시대에는 관리되지 않던 조선인 생활 깊숙히 침투하여 관리하게 된다 - 조선 시대 공동체 단위의 생활 공간은 정부와 민간인이 조세를 위한 간접적 접촉만이 있었다.


전신, 전화, 신문, 라디오 같은 매체를 통해서 마을이나 지역의 좁은 공간안에 갇혀 있던 조선인들은 갑자기 확대된 생활 공간 속으로 강제 편입 된 것이다. 시공간의 축소에 따른 새로운 서구적 개념이 요구된 것이다. 법체제를 통해서 그들의 행위는 새롭게 평가 받았으며, 미디어를 통해서 동시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일제는 1930년대까지 지주제를 통해서 농촌을 간접적으로 통제(미곡 수출로 인한 쌀값의 급등과 농민 수탈의 심화)하였으나, 전세계적인 공항의 여파로 쌀값의 폭락과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농촌 경제가 붕괴되고 농민들의 저항이 커짐에 따라 정책을 바꾼다. 일본 식민지 정부에 온정적 단체들과 관변 단체들을 육성하여 농촌에 긴밀히 침투하고 통제 정도를 강화하는 쪽으로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1930년대가 되면 조선내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지주들은 공업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자본 투입을 이쪽으로 돌린다. 물론 농촌에서는 수탈 경제가 한계에 이르러 농민들의 저항이 커진탓에 대지주들의 지배력이 약화된 것도 한 요인이다.


농촌에 조합주의를 확립한 역사는 1970년대 박정희 통치하에서 그대로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모방된다. 


일본에서 한국쌀을 수입함으로써 일본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경제적으로 곤궁한 사람들이 먹는 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지식층중에서는 식민지 당국에 의한 조선 농촌 개발과 산미증산계획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침투를 촉진할 것이며 이는 조선 농촌의 무의미한 개발 결과만을 남길 것이라 회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산미증산 계획이 시행됨에 따라 이를 이데올러지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비판적 자세를 보인 사람들도 꽤 있었다.


지금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민족주의 뿐만 아니라 분단 이데올러지가 뒤엉켜 체제를 옹호하는 경직된 시선으로 과거를 바라보고 있다. 이는 과거를 미워하던지 증오하던지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는다면 양쪽 모두로부터 변절자로 낙인 찍히는 어두운 시기인 것이다. 삶이란 단순이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지고 흑과 백으로만 나누어 볼 수 있는 단편적인 피조물이 아니듯이 역사란 역동적인 사람들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제 시대를 하나의 시각으로만 바라본다면 결국 그 역동적이고 활기찬 시대를 어둡고 검은 밑바닥만으로 들여다보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한다. 분명 외압에 의해서 강제로 이식된 근대라는 관념이 지대하던 시대지만 시간은 단절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 시간의 흐름속에서 다양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결코 민족주의자가 아니면 변절자만 존재하는 시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란 끊임없이 후대에 의해서 재해석되는 과정이지만 이런 재색의 가능성은 삶의 다양성 덕분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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