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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9. 09:00 - 독거노인

<조선상고사>


신채호의 역사 인식의 근본은 역사의 발전 혹은 진행 과정이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그 바탕이 되는 것이 사회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 개인적 존재보다는 총체적 상호작용 속에서 역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의기본은 공동체일 것이고 이를 확장하면 지역과 국가로 이어질 것이다. 결국 가장 큰 테두리가 국가 혹은 민족이 될 것이다. 이를 약간 비틀어 보면 민족은 민족과 만나서 서로 투쟁하는 하나의 충돌이 존재하게 되고 승리하는 자가 당연히 다른 민족을 합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물론 이런 민족속에도 아와 비아의 개인적 투쟁은 연속되고 있다. 이런 연속적 투쟁이 민족으로 이어져 민족 전체의 이념이 되고 이 이념의 실천이 국가가 되는 것이다.

<조선 상고사>에서 조선 역사 기술은 유교주의에 기반하여 유교주의에 반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들어내고 유교주의에 적합한 내용으로 속을 채움으로써 역사적 과정을 왜곡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신채호가 말하는 유교주의적 역사에 대한 비판은 일본 식민주의 역사관이 만들어낸 조선 유교주의의 편협성에 대한 비판과 괘를 같이 하고 있다.

조선의 유교주의적 문화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접근하면 신채호의 비판과 일본 식민주의적 역사 접근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수 없는 단순한 역사적 접근법을 가지게 된다. 결국 식민주의를 극복하고 편협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인식이 필요하다. 물론 신채호가 말하는 역사적 기술 방법과 동일한 이야기지만 기실 그가 바라보는 한민족 역사의 왜곡은 하나의 국가가 성립될 때마다 이전 국가에 대한 부정으로 시작하여 역사를 단절하고 의식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한민족의 역사는 국가가 성립될때마다 단절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단절중에서 조선 왕조에서 시행한 단절이 가장 심한것으로 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걸 뒤집어 보면 한민족이라는 이념은 조선시대까지 결코 민중들 혹은 지식계층에까지 퍼지기 힘든 이데올러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왕조에 대한 충성이 강하면 강했지 결코 하나의 민족으로서 국가에 충성해야 된다는 개념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역적 고립성을 따진다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 이상을 확장해서 하나로 묶어내는 이념 자체는 지식층이나 양반층 같은 상위 계급이 아니면 내재하기 힘든 사상이었을 것이다.

결국 신채호가 조선의 민족주의적 사상을 만들었지만 이 민족주의적 시각을 버리고 말년에 무정부주의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런 동전의 양면과 같은 역사적 접근법을 포기하고 좀 더 폭 넓은 역사적 시각을 받아들인 혹은 접근 방법의 오류를 인식하고 새로운 접근 방법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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