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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9. 09:00 - 독거노인

<학문의 제국주의>


1970년대는 미국에 있어서 물질적,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전환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충격의 모티브는 베트남 전쟁일 것이다. 그동안 미국이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던 정체성과 철학적 기반 자체가 의심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문화, 예술, 학문에 전반적인 영향이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된다. 


저자도 밝히고 있지만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과연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하던 미국의 정신적 기반이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고, 이는 자신이 나아가고 있는 학문의 방향조차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학문이 국가적 이데올러지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과거를 둘러보는 그리고 타국의 과거를 둘러보는 역사학에서 이런 국가적 이데올러지가 뿌리부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기존에 동양사, 특히 중국의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은 서양의 충격과 중국의 반응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오랜 잠에 빠져 있던 중국이 서양의 영향 혹은 충격으로부터 깨어나는 과정을 기술하는 식이다. 왜 중국은 고도의 상업주의 발달이 자본주의적 과정으로 이행하지 못했는가를 규명하려 하고 있으며 서양의 자극이 없었다면 영원히 정체된 상태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고 가정한다. 이 가정의 한 끝에는 모든 사회적 이행 단계는 최종적으로 자본주의 체계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과연 역사적 결과론에 입각해서 자본주의가 궁극적인 사회 발전 단계인가 이외에 대안적 단계는 존재하지 않았을까라는 의구심은 배제된다. 이는 서양적 시각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하는 중국의 역사학자들의 시각에도 교묘히 숨어 들어 있는 이데올러지다. 결국 동전의 양면이 하나의 동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서양의 역사학자들이 수행한 근대 이행 과정의 중국에 대한 서술은 중국을 타자화하고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서양만의 시각으로 기술하고 있다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기나긴 안정속에서 변화가 없다고 가정하는 것은 결국 근대라는 서양의 산물에 동양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편향된 시각만을 이야기할 때 실제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던 격변적인 활력을 내부로부터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중국은 서양의 충격이 영향을 미치기엔 너무나 광대하며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럽과의 교역이 영향을 미치고 가장 활발한 상교역을 일으킨 곳은 결국 해변가의 개항장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 뿐이었다고 한다. 결국 내륙의 궁핍한 지역이나 유리된 지역들은 자신들만의 내부 에너지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변화를 단순화해서 변법자강 운동이니 태평천국의 난이 서양의 영향으로 인한 에너지 폭발이라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서양적 사고의 오만인 것이다. 분명 이런 변혁의 시작이 서양의 영향이 존재하나 중국 자체의 사회적 상황으로 인한 에너지의 폭발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상업의 발달, 관리의 부패 심화 등으로 격변을 겪고 있었음이 연구를 통해서 들어나고 있다.  


역사란 현싯점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거울과 같은 이미지일 뿐이다.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어느 곳을 바라 보는가에 따라서 역사적 풍경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그 모습 어떤것이 역사적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그 풍경이 제시하는 이미지들이 분명 역사적 모습이며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모습중 일부를 보았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 풍경은 멀리서 바라볼 수도 혹은 자신의 영토위에서 바라 볼 수도 있다. 어느 시각만을 강조하여 다른 시각을 무시하고 일견 자신의 풍경만을 진실이라 믿어 버리는 것은 자신 스스로를 역사적 함정에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서양의 시각으로 바라보던 폭력적 시각으로부터 우리는 언제쯤 해방될 수 있을까. 21세기가 되면서 수많은 논의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진정한 화합은 요원해 보인다. 중국처럼 다양한 지역과 많은 인구로 인해서 접근하기 어려운게 아니라 우리의 현실 위에 놓인 사상적 늪이 너무나 깊어서 그 늪을 건너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데올러지에 오염된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서 결국은 이데올러지의 희생양이 된 역사적 사실들을 구해내야 진정한 역사 쓰기는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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