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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2. 09:00 - 독거노인

<India: A million mutinies now>


1860년대 이민자(이민 노예계약자)들은 영국 제국의 다양한 지역으로 보내졌다. 문화, 언어가 상이한 곳에서 그들은 종교와 카스트의 차이를 '상상의 인도 공동체'로 덮고 살아 남았다. 저자는 그런 공동체 속에서 인도를 상상하며 자란 이민자의 후손이다. 그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서 인도로 돌아와 여행하며 느낀 것은 결국 그가 살아왔던 상상의 공동체 개념은 작은 사회에서 유효한 것이지 실제 인도 거대 사회를 수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힌두교 근본주의를 표명하는 Shiva Sena(쉬바의 군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뭄바이 슬럼가의 그 지역 공동체를 대표하고 공동체 문제 해결에 긴밀이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힌두교 갱단에 대처해서 무슬림 슬럼가에는 그들만이 갱이 존재한다. 인도에서 갱은 마치 연예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신문과 방송 매체에 등장하며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발리우드 스타처럼 행세를 한다. 뭄바이의 빈민가 사람들을 이용하는 건 갱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주의 그리고 힌두교 근본주의의 현혹적인 수사어구로 이들의 환심을 불러 일으켜 그들의 표를 얻어 지역적인 정치 조직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특별한 배경도 학문적 지식을 갖춘 것도 아니다. 단지 반향을 일으키는 급류에 잘 얻어 타 앉아 빈민가를 대표하는 지역적 거물로 성장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 어디에 있으며 누구를 배경으로 성장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빈민가 사람들이 끊임 없이 찾아오며 그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힌두교와 무슬림의 충돌이 있을 때 항상 소요의 중심에 있으며 그들의 문제를 더욱 악화 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종교적 충돌은 항상 가장 힘이 없고 약한자들을 대상으로 가장 악날한 희생자를 찾아낸다. 결국 힌두교 소요가 발생했을 때 가장 희생을 당한 것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중산층에 편입되어 있던 무슬림들이 아니라 빈민가에 살고 있던 무슬림들이었다. 희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무슬림들은 자신들만의 갱을 만들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힘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뭄바이 슬럼가 옆에 살고 있는 펀드 매니저는 자신의 종교적 교리에 따라서 미래 언제가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봉사를 꿈꾸며 살고 있다. 그가 여가 시간을 이용해 베푸는 무료 급식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선물이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을 더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서 은퇴를 해야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푸자 의식을 올리는 현자(guru)는 지방의 사원에서 뭄바이로 이주해 왔다. 뭄바이의 현대화에 맞춰서 푸자 의식도 변형되고 있으며, 바쁜 뭄바이의 생활 패턴에 맞춰서 변형된 푸자 의식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전통적 방식의 푸자를 고수하며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뭄바이의 교통체증은 그가 하룻 동안 이동 할 수 있는 이동 거리를 제한하고 그에 따라서 그가 푸자 의식을 올려주고 받는 댓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줄어들게 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현대적 수단을 통해서 테이프에 자신의 푸자 의식을 녹음해서 팔기도 하며 결혼의식에서 올리는 기나긴 푸자의식의 시간을 단축해서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 열을 올린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의 전통적 방식으로 올려지는 푸자 의식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고 가난하지만 생활에 큰 지장을 받지 않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발리우드 작가는 YES맨으로 인기와 돈을 벌었지만 회의를 느끼고 작가 생활에서 은퇴를 한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길이기에 발리우드 작가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발리우드 시스템으로 들어가 예전의 영화를 꿈꾸며 재기에 나서고 있다. 


Dr. Ambedkar의 불가촉천민에 대한 신분 해방과 상승운동은 그들을 신분적 압박과 사회적 압박에서 해방 시키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들로부터 커다란 지지를 얻었다. 그로 인해서 정치적 상승 뿐만 아니라 하나의 신화적 인물로 등극했다. 중산층들은 이런 운동을 안정된 사회 시스템에 불안을 가중 시키는 원인으로 생각한다. 


마드라스는 남인도 브라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신성시 되는 사원들과 최고의 브라만들이 그들 고유의 문화, 생활양식, 종교가 합일된 채 살았던 곳이다. 간디의 깨달음과 실천에 괘를 같이 해 반브라만, Dravidian 운동(상인계층이 중심이 된 중산층의 운동)이 전개 되었었다. 철저한 우상 파괴 운동이었으며 늘어난 중산층의 부와 요구에 의해서 그 추동력을 얻었고 정치적 성장과 성공을 일궜다. 마드라스가 반브라만 운동으로 브라만들이 많이 쇠락해졌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욕구와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브라만만의 삶으로 돌아와 그 삶을 실천하는 이들도 있다. 브라만은 오염되는 것을 극히 꺼려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특히 현대적 물질적 삶에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카스트 계급과는 무관하게 많은 이들 속에서 오염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오염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고립될 수 밖에 없으며 제한적인 삶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캘커타에는 낙살리트 운동에 참여했던 엘리트들이 있다 - 전에 읽은 <저지대>가 이 운동을 배경으로 삼고 있고 낙살리트 운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식량폭동과 그 후에 농민운동으로 조직화된 이 운동의 지지자들은 인도의 낙후된 빈민들에 대한 열정과 애정으로 실패한 혁명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그들과 관계 맺으며 도우려 했다. 


골드템들에서 발생한 시크교도들의 반란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진압되었다. 진압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가졌다. 왜 좀 더 적극적으로 단수와 절전으로 골드템플 안에 있는 이들의 행동 반경을 좁히지 않았을까? 좀 더 적극적 작전을 펼쳐서 좀 더 적은 희생을 감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 골드템플에 있던 이들에 대한 복수로 간디 수상은 시크교 경호원에 의해서 피살된다. 골드템플의 반란 지도자 Bhindranwale은 십대에 골드템플에 보내져 양육되었으며 어린 나이에 명성을 쌓게 된다. 그는 박해받던 시크교 구루들을 언급하며 시크교가 가지는 억압의 역사를 언급한다. 그의 명성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는 구호는 수많은 시크교도들의 호응을 얻었고 결국 비극의 역사를 불러온 것이다. 그의 옆에는 군에서 장군으로 예편한 장교가 그의 참모로서 골드템플 비극의 작전을 수행했었다. 그들이 그토록 신성시 하던 골든템플은 그 기간동안 그들의 손에 의해서 오염되었으며 더럽혀졌다. 


1990년대에 쓰여진 그의 글이 남긴 인도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얼마나 차이가 날까? 아니 얼마나 변화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그가 이야기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 속에 존재하는 인도는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여전히 던지고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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