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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20. 09:00 - 독거노인

<열하일기>


열하는 지금의 중국 승덕(承德)을 지칭한다. 중국 건륭제가 여름 피서를 즐기는 곳으로 박지원이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과 같이 동행하게 되면서 여행기로 남긴것이 열하일기다. 결국 열하일기란 지금의 여행기쯤에 해당되는거지만, 간단한 여행기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열하일기에 나타난 박지원만의 생각과 사상이 깊에 베어 있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관리도 아닌 상황에서 청국의 조문 사절과 동행할 수 있었다는건 그 나름데로의 상류층 혹은 권력층과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연암이 조문 사절과 동행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열하일기를 통해서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문이 가지고 있는 형식보다는 조선 후기의 국제적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저술이라고 보인다. 


기행문을 통해서 보이는 그의 민족주의자로서의 모습은 훗날 등장하는 식민지 사관의 허약한 기반위에 존재하게 되는 신채호의 민족주의적 각성보다 훨씬 앞서서 굳건하게 존재한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연암이 보이는 민족주의적 색채는 조선의 민중과 우국충정의 깊은 사려가 베어 있다. 민족적 입장에서 과거의 역사를 고민하며 잘못된 역사적 인식을 바로 잡으려 하며, 당시 조선에 낙후된 제도와 시설들을 비판하고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길 바라고 있다.


연암이 청나라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청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파악하려하고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이 갖고 있는 회한을 파악하려 한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 국제관계의 커다란 방향성을 파악하고 현재 조선이 갖는 상황을 인식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청나라가 세워진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한족들은 숨을 죽이고 이민족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그들의 소리는 밖으로 나갈 수 없고 그들의 생각은 민중속으로 퍼져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또한 명을 섬기고 청을 배척하려는 깊은 중화사상의 뿌리에 위치한바 지식인들이나 권력층은 쉽게 표출될 수 없는 깊은 여한이 있었을 것이다.  

청나라를 세우고 넓은 중국땅을 다스리는 만주족은 중국 한족들을 달래고 억압하면서 중국내의 질서를 유지했지만, 변방의 이민족들의 침입에는 항상 경계를 해야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름에는 열하에서 몽골쪽을 지켜보며 상황을 주시하고, 거친 티벳의 침입에는 티벳 불교승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위한 작은 포달랍궁을 지어주고 그들을 달랜다. 때문에 열하에 갔던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 황제의 명으로 액덕마니를 영접해야했지만, 유교사상이 깊이 박혀있던 조문사절들에게는 치욕과 같은 대우였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조선 사회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유교주의가 어떤 형태로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섬겼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연암은 열하와 북경을 오가는 사이에 많은 지식인들 그리고 학자, 관리들과 교류를 한다. 필담을 통한 그들의 지식적 깊이를 가늠하고 그들의 생각을 옆볼려고 하는 만큼 청조밑에 있는 한족 지식인들의 사상과 학문적 경향에 대해 논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음악을 통한 지식의 전수과정이 등장한다. 문자가 존재하기 이전에 세대간 지식을 전달하고 보관할 수 있는 수단이 음악이었으며, 
고대 음악은 사회적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예(禮)를 대표하는 수단인 것으로 인식된다. 청나라는 주자학을 적극 장려하고 권장했지만, 기실 그 밑에는 학자들을 억압하고 탄합하는 하나의 정치적 수단이 작용하는 장치였기 때문에 학자들과의 연암이 학자들과 교류속에서 그들의 은밀한 불만을 들춰보려 한다. 

열하일기는 쉽게 읽기 힘든 책이지만 연암의 사상이 깊이 퍼져 있는 책이기 때문에 그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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