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2017. 4. 29. 21:11 - 독거노인

주옥션 이식하기



가끔은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물건에서 커다란 위안을 받거나 애착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물건이 비싸고 최신의 물건이라는 것에는 상관이 없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혹은 자신의 취향에 맞기 때문이다. 주옥션 키보드가 나에게는 그런 경우 중에 하나였다. 지금까지 키보드를 몇개 사 봤지만 큰 돈은 들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비싼 키보드는 사지 않고 버텼는데, 키보드 매니아들 사이에 주옥션 키보드가 유행하면서 그 끝물에 동참했다가 아주 만족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써 오던 키보드들과는 다른 애착이 생긴 것이다. 덕분에 몇년간 회사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는데, 이번에 큰 맘을 먹고 비싼 키보드를 영입하면서 현역에서 물러나게 되었다(결국 주옥션 때문에 비싼 키보드에 대한 로망이 생긴 것이다). 현역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집 구석 어딘가에 그냥 묻히거나 버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잘 써오던 물건에 대한 아쉬운 느낌이 남았다. 특히, 주옥션의 키감이 너무 좋아서 계속 사용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열했기 때문에 키보드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인터넷에서 뒤져봤다. 어떻게 하면 리뉴얼을 할 수 있을까 보다 보니, 가장 손이 덜 가는 방법은 기존에 주옥션 키보드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배선을 다시 해서 새로운 케이스에 넣는 것이다. 두번째는 스위치만 재활용하여 완전 새로운 키보드를 만드는 것인데, 이 방볍이 나에게는 꽤 매력적으로 보여서 도전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한번도 납땜을 해 본적 없는 내가, 게다가 pcb라는 걸 다뤄 본적도 없어서 pcb 배선을 읽을 줄도 모르는 내가 그냥 무모하게 도전해 보기로 했다. 시간은 많으니 하나씩 배우면서 해 보기로 한게 실수였다. 가장 큰 문제는 납땜하기 위한 장비들을 새로 사야 한다는 것. 역시 덕질은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느끼면서 네이버 카페에 짝뚱 납땜기를 사기 위해서 가입하고, 비싼 무연납까지 주문하니 이미 키보드 가격은 안드로메다로 간 상태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니 전진 뿐이다.



그 와중에 배워야 하는 건 납땜만이 아니라 디솔더링도 있었다. 시간도 많이 걸리면서 납 연기까지 마셔야되는 상황이다. 스위치 몇개 빼내는 데 허리가 아퍼서 집중하기가 힘들다. 결국 남들 하루면 하는 일을 몇일을 걸려서 하나씩 스위치를 빼내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이식할 pcb들을 알아보는데, 가격대 성능이 가장 좋은건 역시 중국제다. 알리에서 주문한 pcb는 2주만에 도착했고,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되는지 파악하는 데, 하세월이 흐른다. 그리고 이래저래 돈 낭비를 하면서 깨달은 건 쓸 데 없이 너무 많은 엑서사리들을 주문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알리에서 출발한 상태고 그냥 조립을 해야 되는 상황이 됐다. 그렇게 한달 넘는 시간동안 깨달은 사실들과 조립 과정을 거쳐서 사탄 키보드가 탄생했다. 사진에 보이는 저 넓은 공간들은 메꿀길이 없다. 그래도 주옥션 키보드의 뼈대가 살아 남았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즐거운 시간이었다.


SATAN GH60에 이식한 주옥션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메라  (1) 2017.05.25
<Overbooking>  (1) 2017.05.18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1) 2017.04.24
<두려움과 떨림>  (1) 2017.04.11
<편의점>  (1) 2017.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