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사회의 창출>은 도이힐러의 <한국의 유교화 과정>과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저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조선에 있어서 유교적 정책들은 엘리트 계층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왕권과 지배력 정당성을 쟁취하기 위해서 진행된 면이 있기 때문에 조선실록과 분재기, 족보에 그 영향력이 명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도이힐러의 <한국의 유교화 과정>은 그녀의 결론부분에서 작게 언급하고 있는 경제적 영향이나 그외 정치적 영향에 대해서는 분석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는 순수하게 유교적 이데얼러지가 어떻게 보급되고 어떻게 위에서 아래로 이식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책에서는 사례 중심보다는 고려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유교적 이행 과정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의 법전과 소송 사례를 중심으로 유교적 이념이 실제 생활에 어떻게 적용되고 인식되었는지를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도이힐러의 책은 유교 이식과정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이데올러지 형성과정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인 사례분석을 통한 분석은 유교적 이식과정이 순조롭지 않고 때로는 저항에 부딪히면서 많은 파행적 결과를 가져왔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도이힐러가 조선의 유교적 이행 과정을 전기와 후기로 단순화 시켜서 보고 있는데 반해서 저자는 이행과정을 조선초, 중반, 후기로 나눔으로써 좀 더 세밀하게 유교화 과정을 들여다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식 과정의 문제점들이 극복되고 완전한 유교 사회로 변전하는 과정을 더 잘 보여준다고 본다.
조선사회가 개창되면서 왕조의 초기는 불교와 유교의 혼재가 명확하게 들어난다. 분명 고려의 전통적 삶의 영향으로 조선의 유교는 그 명분을 앞세우며 정당성을 얻으려 하지만 실질적인 삶의 대부분의 고려의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거기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왕조는 자신의 이데얼러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위로부터 아래로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법전을 편찬하고 그속에 이 사상적 행동 양식을 명확하게 심는다. 이를 통해서 과연 엘리트 계층이 얼마큼 그 이데올러지에 동정적으로 반응하면서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스럽다. 게다가 연산군은 불교적 제례를 빌미로 사화를 일으킬 정도이지 않았던가.
여성이 그 권한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보면 양자 입양은 가장 커다란 가정 문제였을 것이다. 조선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교적 교리에 따라서 그들은 가정을 다스리고 가정의 정신적 전통을 세우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따라서 그 전통이란 족보를 편찬하여 그 뿌리를 찾고 그 뿌리에 대한 의례를 갖춤으로써 선영봉사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조상의 정신이 남자의 계통을 따라서 한명의 종부에게 이어지는 과정은 결국 종손에 의한 제사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만들었으며, 이 제사를 위해서 아들들에게 분배되는 재산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자원이었다. 조선 중기로 가면 선영봉사에서 여자들이 배제되고 그 과정에서 재산 상속 문제도 남자들에게만 집중되면서 출가외인이라는 의식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분재기에 나타난 재산 상속 과정을 보면 분명 조선초기에는 균등분배가 원칙이었고 제사도 윤행으로 지냈던 것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제사를 위한 땅을 따로 떼어놓고 장자를 위한 상속 체제를 마련해 간다. 문제는 이런 유교적 관행이 확립되어 가는 과정이 과연 유교적 이데올러지만의 확립으로 가능했는가라는 의문점이 남는다. 저자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농지의 황폐화와 인구감소 다시 식량생산량 한계까지 올라간 인구증가로 인해서 토지에 대한 경쟁이 분명 같이 작용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도이힐러는 이런 다른 경제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깊이 분석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유교적 전통의 확립에 따른 가정내의 권력 분배와 소외의 문제에 깊이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유교적 전통의 확립에 대한 긍정적 설득을 위해서는 분명이 설명되어야 할 경제적 부분들이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경제적 논의가 적음과 같이 해서 양자제의 확립이 명확해 보이지 않는 단점도 있다. 분명 종손을 선호하고 대를 잇기 위해서 양자를 들이는 관행 자체가 조선후기에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고문서에 나타나는 양자 입양에 대한 사실들은 많지만 딱히 남아에 대한 선호나 종손에 대한 선호가 확실하지 않던 조선초기와 비교해서 후기는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는 점이다. 도이힐러나 저자는 유교이념의 확립에 따라서 양자제도 같이 자리를 잡고 굳건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양자를 들이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음이 문서상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친가의 가까운 친척이 아닌 먼친척으로부터 들이려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재산분쟁이 발생했을 때 가까운 친척간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재산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먼친척을 입양하는 것이 유리했을까. 유교적 논리에 본다면 분명 조상의 피를 이어받아 기의 흐름이 가장 가까이 흐르는 남자는 가까운 친척이어야 하지만 조선에서는 오히려 먼친척을 입양하려는 의도는 분명 어딘가에 이데올러지 수용의한 문제도 있지만 경제적 이유도 같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여성은 제사에서 제외되면서 상속을 받을 권리도 상실했으며, 그로부터 여성지위 하락은 급속히 이루어진다. 이런 여성의 가정내 지위하락은 분재기에서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문서에 나타난 단어에서도 들어난다. 총부라는 단어는 여성이 가정내에서 어느정도 실권을 가지고 서서히 잃어가는 지위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단어였다. 남편이 존재하지 않을때 양자를 지명할 수 있고 어느정도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그 싯점에서 사용되던 총부라는 단어는 17세기가 지나자 문서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는 더 이상 여성이 양자 입양시 선택권이나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싯점이라고 보여지는 조선중기의 시기와 일치하는 양상이다.
여성의 가정내 지위 하락과 괘를 같이하는 문제가 서자다. 적서 혹은 서얼에 대한 차별은 조선 초기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이런 차별이 계급적 이데올러지에 맞춰서 형성된것인지 아니면 개인적 감정적 차원에서 위로 올라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재산분배와 과거를 통한 등재 같은 문제는 민감한 문제였고 처리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그 결정되는 결과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후기에는 분명 이런 차별 자체가 의미 없어지고 서얼들은 아녀자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전경에서 사라지고 만다. 분명 그들은 전면에서 사라졌지만 아녀자들만큼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그들의 욕구를 갈망했다. 승계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이들 혹은 그들에게 온정적이었던 이들은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지고 싶어했지만 사회적 시스템은 여전히 굳건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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