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토지>를 보면 구한말 몰락한 양반의 전형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양반으로써 농사를 지으며 살고 후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낼 대가 끊길 위험에 처해 있었고 이것이 그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선영봉사를 위해서 멀고도 먼 여행을 하며 결국 양자를 입양한다. 또 서희라는 양반집 후손이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고 친척에게 빼앗기는 장면도 등장한다. 어찌보면 소설속의 극적 갈등의 요소처럼 보이지만 이는 구한말의 유교적 영향하에 있던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조선 500년 사회에 지속되었다는 유교가 모든 전통을 걷어냈다고 믿어지는 현대 사회에도 아직도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유교적 관습으로 남아 있는 이데올러지가 과연 언제적부터 이 사회에 이식되기 시작했으며, 그 전에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살고 있었을까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이 의문점을 고려시대말부터 조선전기로의 이행되는 체제변환 속에 내재되기 시작한 유교적 이데올러지의 이식과정에서 찾는다. 유교적 이데올러지는 단순히 사상적 지배만이 아니라 실생활속에서 가족제도의 변화를 요구했고 결국 조선후기에서부터 이조말까지 그 확고한 자리를 자리 잡은 전 국가적인 이데올러지이며 지배원리였다.
실제 유교는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수입되었다. 하지만 유교가 실질적인 학문으로써 그리고 사상으로써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중국에서 수입한 주자의 해설서가 한반도에 수입되고 이를 기반으로 한반도에서도 집중적으로 유교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고려시대의 가정은 부부평등체제였다. 이를 나타내는 많은 부분에서 夫나 婦에가 권한이 동등해 제사를 부인이 지낼수도 있었으며, 이는 자식간의 상속에 있어서도 균등상속이 기본이었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남자는 결혼을 하면서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외가쪽의 재산상속에서도 배제되지 않았다. 외손계에게도 제사를 맡기기도 하였으며 장손을 딱히 선호하지도 않았다. 제사에 대한 종손의 제한이 없었고 재산분배에 대한 선호도도 없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결혼풍습 중에서 근친혼이 많았다는 점-고려인들은 친족간 결혼이 많았다-은 재산이 외부로 나가지 않고 친족안(이때 친족은 외가, 친가 구분이 없다)에 머물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공하기도 했다.
조선이 개창하고 유교가 이데올러지적으로 강한 영향을 미치면서 서서히 토착환경에 유교적 관례를 이식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게 된다. 특히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 나오는 제례와 혼례에 대한 유교적 관례의 적용은 개창기의 많은 반발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법전이 이런 유교적 경향을 강조하였지만, 일반 인민들과 엘리트 계층인 양반조차 잘 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긴 시간동안 고착되어 있던 전통 풍습에 맞서서 유교적 투쟁과정을 거쳐서 서서히 이식되어 간 것이다. 아무리 유교적 원리가 확고하다 할지라도 조선에 남아 있는 전통적 관습은 쉽게 변경될 수 없었으므로 유교적 이행 과정에서 어느정도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유교경전에 대한 교조적 해석과 더불어 조선에서만 발생하는 유교적 특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왜 조선에서만 이런 특이한 교조적 유교 해석이 발생한 것일까라는 물음에 답은 결국 아무리 강력한 정치 이데올러지라도 상부에서 하부로 침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이 침투과정에서 저항에 부딪히면서 절대적인 행동강령(예로 주자가례)이 뒤틀리고 상호타협적 산물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유교적 이식 과정은 제례에 대한 장자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시작된다. 제사에 대한 봉사의 우선 순위를 장자에게 이식하고 이에 따른 재산분배도 장자 위주로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차손들에게 차등 분배를 가져오고 이 과정에서 딸은 재산상속에 대한 권리를 점점 잃어간다. 결국 딸들은 재산상속에서 배제됨과 동시에 제사에서도 베제됨으로써 가정내에서의 어떠한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어 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경전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너무 교조적인 해석을 함-유학자들은 그들의 이상을 고대의 먼 주대로부터 찾았다-으로서 학문적 경직화가 나타나고 그 사상의 경직화도 나타난다. 물론 조선 중기에 비롯된 사상적 논쟁을 통해서 유교의 학문적 깊이가 훨씬 깊어진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도이힐러는 이런 경직화에 대해서 유학자들이 가지는 엘리트 계급 강화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왕권 초기에는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혁명 참가자들이 상호타협적으로 정권 안정화에 기여했지만, 왕권 초창기가 지나자 경제적 성장을 기반으로 한층 강화된 엘리트 지배력에 기반해서 외부로부터 자신들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이데올러지들이 강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저자 도이힐러는 유교의 수용과정에서 가정내 부녀자의 지위 변화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특히 그녀가 주목하는 딸의 권리와 권한 축소과정은 유교화의 심화과정에서 형제간의 경쟁 상대로서의 베제 일 뿐만 아니라 가정내에서도 부인으로써 어떠한 권리도 가지지 못하게 되면서 점점 소외되어 가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조선초까지 여성은 가정내에서 남녀간 평등한 권리를 누렸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가정내에서도 그 지위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권한이 제한되고 그 한계가 명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정의 위계는 장자를 중심으로 남자중심의, 부계중심의 가정을 이루고 가정은 곳 사회로 확장되면서 상위계층들의 지배원리에 입각한 엘리층들의 절대적 지배 이데올러지를 완성할 뿐만 아니라 적통 중심의 신분제를 확립한다. 이에 따라 결혼을 할 수 있는 여자의 신분도 중요해지며, 결혼 상대로서의 여자의 신분이 가족의 신분 유지를 위한 중요한 척도가 된 것이다.
조선은 일반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지향했지만, 조선초기에는 고려때부터 성행하던 중혼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중혼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함께 일부일처제가 고착화되어 가면서 첩의 문제도 같이 고착화되어 간다. 첩에게 얻은 서자가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재산을 상속 받기도 했으며, 제산을 지냈던 것으로 타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과 유교적 해석에 기반한 새로운 장자 상속제가 정착되어가자 첩들과 서얼들은 그 위치가 급격히 격하되기 시작한다. 더 이상 서얼들은 적통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구한말의 서양 여행자의 눈에 비친 조선은 아직도 미개하고 문명의 여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어둠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민중은 끊임없이 귀신들과 온갖 잡귀들에 시달렸으며 그들은 한시도 그들과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너무나 깊게 고착된 이런 민간신앙을 바라보는 서양인의 눈에는 미개하고 때로는 몽매해 보였을 것이다. 조선의 지배층을 지배했던 유교적 사고는 그 뿌리가 아무리 깊게 내려갔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조선 민중의 생활과는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독재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고 보인다. 하지만 민간신앙과 양립하며 그 뿌리를 내린 유교가 현대 한국의 사회에서 아직도 걷히지 않는 주자가례의 일부를 남기고 있는것을 보면 그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에 한번 고착된 이데올러지는 쉽게 걷히지 않으며 그 전환 자체는 무수한 시간을 요구하며 때로는 그 민족의 특성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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