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외국인의 눈에 비친 고종은 나른한 눈빛을 가진 선한 왕으로 비쳤다. 이에 비해 민비는 영특한 지혜를 가지고 차분한 눈빛에 온화한 빛을 내는 왕비로 묘사되고 있다. 둘은 외국인에 대해서 아주 친철하고 온화한 태도로 접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또 다른 이면에 고종은 환관들에 둘러싸여 겁많고 소심(이때 민비가 암살된 후에 고종의 위축된 모습이다)하며 어떤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나약한 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어찌보면 외국의 권력앞에서 풍전등화처럼 휘둘리고 있던 고종의 모습은 강한 국권을 가진 외국의 대사들에게 혹은 여행자들의 눈에는 한없이 허약해 보였을 것이다.
이 책은 고종이 왕권을 물려받고 섭정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왕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조선의 마지막 순간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대원군은 자신의 발톱을 들어내기도 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재야속에서 칼을 갈고 있었으며 자신의 권력 기반이 없음을 불안해 하던 조대비와 손을 잡음(이 부분은 정확한 사료가 아니라 역사적 정황으로 추측한 부분이다)으로써 극적으로 역사무대 앞에 모습을 들어낸다.
현재 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추진하고 대내적으로는 개혁을 단행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저자는 대원군에 대해서 내려지고 있는 내부 개혁론자에 대해서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분명 개혁을 추진한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부패에 대해서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고 혁신을 추진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실용적인 개혁안을 추진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 국내 학계와는 상반된 부분이 아마도 토지세일 것이다. 국내학계는 대원군은 서원과 양반들에게 토지세를 거두어 과감한 혁파를 했다고 보지만 오히려 대원군은 기득권층에 대한 침해 없이 부분적인 그리고 그들의 이익을 건들지 않는 부분에서 개혁을 진행한 것이다. 기존에 유지되던 대농장체제는 그대로 존속하면서 일부 사원이나 왕족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들에 대해서 세금을 올린 것이다.
대원군의 정책중 가장 민감한 부분이 아마도 서원 철폐일 것이다. 특히, 만동고의 철폐는 유림들의 대대적인 항의와 시위를 벌이게 만들었다. 기실 조선은 국가가 민중의 교육 시킬 책임을 방기하고 사설 교육을 방조한 탓에 서원이 활성화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게다가 서원은 유림들이 결속을 하기 위한 하나의 구심점이 될만한 좋은 소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원이 가지는 상징성은 커다란 것이었으며 대원군이 이를 시행할 수 밖에 없는 하나의 구실이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조선의 전 기간에 걸쳐서 존재하던 당파 싸움은 서원이 커다란 구심점이었지만 18세기말과 19세기 초에는 그 당파싸움의 세력 다툼은 외척간의 권력 투쟁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서원이 가지는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원군이 서원철폐의 칼을 빼 들었어도 그 영향력 자체는 상징성에 비해서는 약하다는 것이다.
대원군이 이런 일련의 개혁과정에서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왕권의 강화일 것이다. 조선의 전통적으로 왕권이 약하고 문반에 의한 견제가 심했기 때문에 왕권은 억눌려 있었다. 따라서 대원군은 이런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왕의 족보에 누락되어 있던 계보를 다시 정립하고 경북궁 재건에 나선다. 이런 강행군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결국 파국적인 운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외국 열강들은 더 많은 땅과 이익을 찾아서 전세계를 누비고 있었고 중국은 그 영향하에서 갈갈이 찢겨지고 있던 상황이었으나 조선은 이런 시대적 상황 인식을 못하고 결국 그 시간을 허비하고 만 것이다.
대원군의 호포제 실시에 대해서 저자가 가지는 의견과 데이터는 저자 논의에 수긍하기 힘든 부분이다. 대원군이 호포제를 실지하기 이전에 이미 지방의 읍단위로 할당된 군포를 읍의 백성들이 균등분배해서 납을 한 사실이 기록에 나온다. 하지만 이런 기록은 조선의 전체를 두고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고 일부 지역에서 행해졌던 방식일 것이다. 정확한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저자는 이 소량의 데이터로부터 호포세 도입의 중요성을 많이 삭감하고 있다. 어쩌면 양반들의 커다란 반발 작용 중-대원군 지지의 약화-의 주요한 부분이었을 수도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논의의 요지가 아무래도 약하다.
대원군의 권력은 정통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종이 가지는 유교적 교의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그 권력 지반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고종이 친정에 나섰을 때 대원군은 자연히 밀려났을 수 밖에 없었고 그는 결국 은둔의 길을 선택했다. 고종이 물려 받은 상황은 결코 녹녹치 않았고 시간은 촉박했다. 그는 유교적 교의에 충분히 젖어 있었고 결단력과 지혜는 부족했다. 그가 직접적으로 개혁을 단행하거나 왕권을 행사할려할 때 그의 나약함은 커다란 장애물이었고 그 나약함에 기인했던 아니면 자신들의 기반이 약화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문반들에 의해서 억눌렸던 고종은 상황에 쉽게 염증을 느끼고 체념하는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이는 훗날 민비의 세력이 커지는 하나의 상황을 만들어줬으며 외부 세력에게 휘둘리는 연약하고 불운한 왕조의 말기를 맞히하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유림들과 기득권층은 자신들이 가지는 이익의 조금한 틈도 허용하려하지 않았고 그들은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았다. 조그만한 사의에 쉽게 흔들렸고 외부 변화 인식력은 극히 미약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지금의 기득권층이 가지는 생각과 필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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