괭플랜이라는 웃는 남자의 탄생은 시대의 결과물이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채 태어나서 강제된 얼굴을 가지고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아이. 어린 나이에 냉혹한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으면서도 죽은 여인으로부터 아기를 구한다. 자신의 생명조차 담보할 수 없는 혹독한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낸 것이다. 아이의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선의 발로였을까. 그것을 알 수 없지만 위르시스는 이 두 고아를 받아 들이고 괭플랜을 웃는 남자로 길러낸다.
저자가 숭고한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인간의 존엄성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잔혹한 시대적 상황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영국의 공화정이 무너지고 다시 왕정으로 복귀한 시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인간의 열망과는 상관없이 시스템을 떠 받들고 있는 몇몇 소수의 권력층에 의해서 세상은 황폐화되고 압제된다. 이 압제에 항거할 수 있는 민중들은 어둠속에 묻혀서 신음만 할 수 있을 뿐이며, 그들의 비참함에 스스로 고개를 돌리고 만다. 이런 연민조차 받을 수 없는 가장 밑바닥에 던져진 광대, 그나마 그들에게는 떠돌 수 있는 자유만이 주어져 있다. 만일 이들이 벗어던질 수 없는 민중들 속에 있었따면 아마 그들의 고통에 살아남아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간보다 더 숭고한 늑대 오모와 스스로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곰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위르시스가 인간에게 버림받은 괭플랜을 길러내고 괭플랜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데아를 살려내고 밝은 세상에 외면 당하고 시대에 거부되어진 데아를 여신처럼 숭배한다. 어쩌면 어두운 세상에서 순간의 빛남에 현혹되어지는 것보다 마음의 눈으로 민중의 진실함을 바라볼 수 있는 데아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신에게로 이르는 길일수도 있을 것이다.
괭플랜이 민중들의 처참함 속으로 뛰어드는 순간 그들의 행복은 사라지고 시대가 요구하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속에 내던져지고 그 속도에 중심을 잃어버려 결국 그들이 저항하지 못하는 세계를 이끌고 가버린다. 이 얼마나 처참한 시대인가. 인간의 기본적 삶조차 담보할 수 없는 민중의 삶에서 가장 최상층의 권력안으로 상승했지만, 결코 그들과 어울릴 수 없고 그들에게 진실된 시대의 요구를 할 수 없는 오히려 광대로서의 취급받으며 그들의 담장 밖으로 던져져 버린 인간이다. 버려진 인간 괭플랜은 타인으로부터 구원되기 보다는 스스로 구원되기를 원하며 권력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내쳐지기 보다는 세상을 벗어난 것이다. 유일한 희망은 데아이며 데아는 빛이었다. 빛은 어디서 오는가. 빛이 오는 길은 천상으로부터만이 유일하다. 빛은 결국 자신이 내려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며, 괭플랜이 빛을 찾아서 떠난 길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인 데아를 찾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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