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17. 09:00 - 독거노인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


조선시대는 농업생산이 경제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대였다. 유교적 이데올러지하에 양반들은 자신의 재산을 기반으로 정계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으며, 기층민중들은 자신의 삶 전체를 투영하는 농사에 매달려 살았다. 조선은 근본적으로 농본천하지대본을 외치는 시대였던만큼 관료가 되면 재산축척 즉, 농지를 늘릴수 잇는 수단과 기회가 많았던 시기다. 관료가 되기까지 엄청난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관료가 된 후에도 농지에서 나오는 상당한 양의 물질적 도움이 필요하다.


저자의 설명은 조선초기 많은 양반들이 처가가 있는 향촌으로 귀향했으며, 처가의 재산을 기반으로 향후 과거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관료로 진출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이 향촌으로 이동하면서 비어있던 많은 공간들이 개간되어 경작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양반들의 기반이 되었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임란 이후에 실시된 개간 사업으로 많은 땅이 확보되었고 실제 인구증가도 수반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임란전에 존재하던 인구분포와 여말에 존재하던 인구분포가 꾸준히 증가했다면 혹은 적어도 감소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왜 많은 공간을 개간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으며 농민들은 왜 이용 가능한 공간들을 버려두고 있었을까? 이와 연관되는 문제가 고려나 조선초나 거대한 노예사회였기 때문에 실제 양인들의 비율이 농지를 적극적으로 개간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지 않았다고 봐야할까?


임란 이후 국가의 적극적인 개간장려와 함게 양반들은 노비들을 동원하여 경작이 중단된 땅이나 새로운 땅을 개간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때 개간 주체가 양반이 아니었으므로 개간인과 양반 사이에는 소유권에 대한 의식이 공동으로 존재했고, 양반은 적극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이는 가급적 지주 가까이 있는 논들은 가작을 하게 만들었으며 멀리 떨어진 곳은 어쩔 수 없이 노비들에게 병작을 하도록 만들 수 밖에 없었다. 노비들은 자신의 생계를 책임질 사전을 따로 분배 받았기 때문에 지주들의 논에 대해 적극적으로 경영할 의무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태업을 하거나 추수 곡식을 빼돌리거나 땅을 몰래 팔기도 했다. 지주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이를 방어하기가 힘들었던 시기다. 


개간 사업이 장려된 시기에 이앙법이 보급되기 시작한다. 이앙법이 보급되기 전, 직파법으로 농사를 짓던 논에서는 제초작업에 많은 인력을 투입해야만 했다. 이앙법이 보급되면서 제초작업에 필요한 인력이 급격히 줄어들고 그 노동력을 다른곳에 사용할 수 있게 된다.하지만 이앙법은 이앙 시기에 물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저수지나 강을 끼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이앙법은 16~17세기에 걸쳐서 서서히 보급된다. 이앙법의 보급은 절감된 노동력으로 간종과 손이 많이가는 면화, 담배 같은 환급작물들을 재배 가능하도록 했다. 


16세기 병작은 가작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만 시행되던 형태였기 때문에 소유권이 강화되는 시기가 되면 지주들은 병작을 더 선호하게 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지주의 권한이 강조되고 소유권이 확립되면서 지주들은 그 권위와 소유권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병작을 시행한다. 뿐만 아니라 지주권이 강화된 결과 조선초에는 종자와 지세를 양반이 부담하거나 반반 나눠서 부담하던 관행이 경작가에게 전가된다. 18세기가 지나면서 병작 토지 크기는 하향 평준화를 거치게 된다. 몰락 양반뿐만 아니라 도망한 노비, 양민들은 경작할 땅을 얻기 위해서 지주의 문앞에 줄을 서야만 했다. 이 시기에 병작하던 논에는 이앙법의 효과(퇴비의 적극적 사용)에 따른 생산량 증가를 넘어서 최대한의 산출을 위해서 이모작을 시행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지력 감퇴로 이어지고 실제 산출량은 감소하는 현상을 보인다. 병작농들은 영세하고 남는 노동력을 지력 상승을 위해서 퇴비에 쓰기보다는 간종이나 이모작에 더 치중할 수 밖에 없엇던 것은 그만큼 그들에게는 생계 자체가 절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 학계에서는 18세기 조선에서 생산성 증가와 상품을 증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에 의문이 과연 인구 증가를 넘어설 정도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졌을까와 하향 평준화된 소작인들이 생산해 내는 산출물과 적극적 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농이 생산해 내는 산출량이 전체 조선 인구 증가율을 충분히 추월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지주권의 강화는 소작농에게 봄철 종자와 결세 지불을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결세는 비탄력적 적용을 통해서 농민들을 기아선상에 놓이게 만들 정도였다. 양반들은 최소한 자신들의 지위와 家格 때문에 최소한 농민들을 잔혹하게 다루지 않았지만 결세는 대부분의 농민을 기아선상의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몰아 부치고 있었다. 


18세기 되면서 대부분의 양반들이 논을 선호하는데 반해서 밭에서 나오는 작물에 대해서는 부차적 관심으로 전락하여 도지액을 크게 책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부농으로 등극하는 농민이 있었는가하면, 농민(몰락한 양반)들은 하양 평준화되어 영세화에 이르게 된다. 이런 몰락 양반이 등장하게 된 하나의 축은 분할상속이었다. 도이힐러가 주장하는 것처럼 조선에 유교 이식 과정은 하나의 경직된 유교이념이 심화되면서 남녀평등적 분할상속에서 장자 중심의 상속체제로 변화하게 만들었다. 도이힐러가 구체적으로 경제적 관점에서 이런 심화과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 않지만 이 책에서는 늘어나는 인구와 더불어 형제간 균등상속은 토지의 분할과 영세화를 촉진한 한 요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씨족중심 마을이 생기고 종전(족계답)을 확보하여 문중에서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과연 몰락 양반 생산을 촉진했던 부분이 분할상속에만 있었는지 의문이다. 17~18세기에는 가혹한 환경에서 노망치는 노비들이 속출한다. 만일 노예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이들은 노동력 상실로 경작의 한계나 경쟁에서 뒤쳐지기 시작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일제 감정기에는 미곡 수출로 지주들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특히 광작을 하던 지주들은 적극적 경영으로 더 많은 땅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친정부적 성향이 아닌 이들에게는 결국 몰락의 길로 들어 설수 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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