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2014. 2. 10. 09:00 - 독거노인

<벤투의 스케치북>


역자는 후기에서 책의 의미를 사소한 것에 대한 유의미함으로 존버거의 스케치북을 설명하고 있다. 이 "사소함"에 담긴 의미는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 담긴 의미일 수도 있다. 본다는 것에는 여러가지 행위가 종합되어 있고 그 의미는 유의미하게 남아서 뇌리 깊은 곳에 새겨질수도 혹은 무의미하게도 보는 순간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역자가 생각하는 사소함에 있어서 담겨 있는 의미라는 것을 이끌어 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본다는 행위와 그린다는 행위는 사소함에 담긴 함의를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위를 배제하고 오로지 자의식이 발산하는 능동적 의지를 투영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림 속에는 자신의 자의식과 행위 의식이 일치하는 부분은 그림에 남을 것이며 불일치 부분은 그림 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는 현실속에 존재하는 단순한 사물이 그림 속에 반영됨으로써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곧 현실 인식과정이 개입함으로써 철학적 사유의 과정도 닮아 있다. 


존버거는 이 책을 통해서 그리는 행위에 단순히 전착하여 그 결과물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그림들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신이 그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그린다는 행위에 수반하는 책임감을 보여주고 여기에 개입되는 현실과의 투쟁이 들어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루카는 직접 아내를 보살폈지만, 로잘리는 서서히 기능들을 하나씩 잃어 갔고 마침내 병원에 입원했다.

...

몇 달 후 병원에서는, 더 이상 로잘리를 돌볼 수 없다고, 사설 요양원을 찾아보라고 했다.

...

한달에 삼천오백 유로였다.

차로 요양원에 데려다 주자, 아내는 미소를 지었다. 아내가 문 앞에서 미소를 지은 그 방으로 정했다.

그날 밤, 그는 은행 잔고를 계산해 본 다음 달력을 펼쳤다.

아내는 새 요양원에서 잘 지낼 것이다, 달력에 적었다. 삼 년 정도 정확히는 천구십오 일이다. 그 이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렇게 적고 사인했다.

<본문 中>


자본은 더 이상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자본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계약에 의해서 올가미를 엮고 그 과정안에 금융이 매개하도록 하며 이 올가미를 벗어나려는 자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는 끊임 없이 자본에 감시 당하며 우리 자신을 조금씩 내다파는 생활을 연명할 뿐이다. 이 지구상에서 이제는 더 이상 숨을 곳도 도망갈 곳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정의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이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존버거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순히 미래를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순간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권력으로부터 금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월의 어느날  (0) 2014.02.24
<동남부 중국의 종족조직>  (0) 2014.02.21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  (0) 2014.02.07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  (0) 2014.02.03
시간을 뜯어 먹고 사는 우리  (2) 2014.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