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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21. 09:00 - 독거노인

<동남부 중국의 종족조직>


저자는 푸젠성과 광둥성의 동성촌락을 중심으로 자신의 인류학적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저자가 글을 쓸 당시는 자유로운 출입이 불가능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해외에 있는 화교들과 다른 분석 글들을 통해서 자신만의 모델을 만들고 있다. 논증의 여지는 있지만 분명 서구 인류학자의 눈으로 동양적 가족/종족 체계를 분석한 결과는 아주 훌륭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푸젠성과 광둥성의 동성촌락은 농업중심의 경제 생활을 영위했으며, 축제와 제사를 위해서 종족 토지가 존재했다. 이 토지는 우선적으로 집단내의 소작인에게 경작되도록 했으며 매매가 발생할 때도 같은 친족내에서 매매가 우선적으로 발생하도록 했다. 만일 친족내에서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외부인에게 매매했다. 전형적인 농업 경제였기 때문에 경제력의 바탕이 되는 토지는 분할 상속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장자는 선영봉사 목적으로 재산 상속을 더 받았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토지는 분할되고 이들은 결국 소농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속에서 부농들은 가족간의 결속력을 강화하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속적으로 보존하려고 했다. 


중국의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필요했고, 그 경제력의 바탕을 가진이들이 권력을 가짐으로써 그들이 은퇴후에 향촌으로 돌아왔을 때 권력에 기반하여 높은 지위를 누리면서 종족과 정부의 행정 기구들과의 중재역활을 하였다. 이들은 국가에서 높은 관직을 누리면서 지배적 위치에 존재했던 것만큼 종족내에서도 존경을 받고 권력을 누렸을 것이다. 또한 관리로 진출했던 이가 가문을 드높이고 높은 고위직으로 오르고 명성을 얻는다면 사후에도 그는 사당의 높은 자리에 봉해질 것이다. 이런 관리가 종족내에서 배출된다면 그 종족은 외부에 대해서 높은 위상을 들어낼 뿐만 아니라 종족 집단 전체가 그 관리자로 인해서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다.  


각 가족 집단과 종족 집단은 연장자를 지도자의 역활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이들은 중재자로서의 역활을 맡아서 세금을 징수하거나 조직안의 분쟁을 조정하는 역활을 하였다. 지도자 역활을 맡는 이가 항상 연장자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직에서 은퇴하거나 재력이 막강해서 영향력이 강력한 사람들이 지도자적 위치에 추대되기도 했다. 이들은 향신으로써 종족내의 재판을 담당하고 세금징수에 협조하는 역활을 맡았다. 이들이 단순히 청정부의 협조자만이 아니라 중재자로서 그들은 중간에 이익을 챙기는 착복자이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지는 권력을 마음껏 이용했을 것임에는 분명하다. 


종족안에서는 새로운 세대가 형성되면 그들은 분절의 과정을 거쳐 가계도의 새로운 가지들을 형성하였다. 이 부계 중심의 가계도에서는 자신의 가까운 앞세대에 대한 제사를 지냄으로써 자신들의 기억을 보전하였고 가족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이들이 선조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선조들은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종족 공동체의 사당으로 옮겨져 위치하게 된다. 사당으로 옮겨진 조상들은 그들의 위계질서속으로 편입될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조상들이지만 그들이 살아있을 때 관직이나 권력, 기부 재산정도에 따라서 그들은 제단의 더 높은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사당에 모셔진 조상들에 제사를 지낼 때조차 참석자들 사이에는 위계가 존재했다. 영향력이나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성원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으며 가난하고 영향력 없는 이들은 주변부를 메울 수 있었을 뿐이다. 이는 가정내에서도 위계가 존재했지만 이런 위계체계는 분절된 성원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족 전체에 퍼져나가면서 위계체계를 형성했다. 종족 집단은 가족간의 결속으로부터 종족 전체의 결속을 다지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동질적인 집단이라는 그들의 결속을 다졌을지라도 이들간의 존재하는 알력과 분쟁은 피할 수 없는 존재였다.  


중국 종족체계가 남성위주로 이루어짐으로써 여성들의 위치는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여자들은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결혼을 통해서 남성의 집으로 옮겨감으로써 처가에 있던 모든 권리는 소멸한다. 결혼한 여자는 시댁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기 위해서, 기존 질서안으로 편입되기 위해서 투쟁하는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었다. 여자가 완전한 위치를 점해지는 순간은 사후에 남편과 함께 제사를 받는 위치로 옮겨가면서다. 결혼한 여자가 집안내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남편을 통해서 간접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방법은 전통적으로 중국인의 의식속에서 결혼을 통해서 집안에 들어온 여자가 형제간 분란 혹은 집안 분란의 원인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분명 더 큰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종족이 그보다 약하거나 소규모의 종족들보다는 더 우위에 있으면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규모 혹은 약한 종족은 더 큰 종족에게 의탁하거나 종속됨으로써 그들의 안정을 확보하기도 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실제 이러한 개연성은 청시대에 지방행정에 있어서 국가 권력이 자유방임에 가까웠다는 것을 생각함으로써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지현이나 성장은 분명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실제 마을 단위까지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고 관리들은 그 지방의 유력한 신사나 향리들에 의존해서 실지배력을 유지했다 - 청대의 관리들은 순환이 빨랐고 자신의 출신 지역에 배치되지 못했기 때문에 현지 사정을 파악하고 행정력을 행사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게다가 조세 징수에 있어서 종족의 우두머리에게 의존함으로써 이들이 국가에 납부하는 조세에 문제가 없다면 관리들은 그 종족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방치 상태를 유지했던 것이다. 


저자가 조사한 지역의 종족들은 종족간의 충돌이 만연했던 것으로 나온다. 종족간에는 유혈 충돌이 빈번했고 그들은 이런 충돌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서 구성원들에게 세금을 걷고 인력을 확충했다. 구성원중에서 가난하여 이런 세금에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이민을 가는 성원도 있을 정도였다 한다. 이런 충돌이 발생하면 지방정부는 개입하고 분쟁을 조정하고 분쟁 당사자들과 성원들을 처벌하였지만 그 분쟁의 씨앗은 내재적인 것이었으므로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었고 종족은 그 대비를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종족 성원들 중에는 이런 분쟁 준비과정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거나 종족간 충돌이 발생했을 때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존재했었다. 


푸젠성이나 광동성의 종족들은 종족간 충돌뿐만 아니라 하나의 종족이 국가에 대한 반란이나 무력행사가 빈번히 발생했다. 청정부는 이런 반항적인 종족에 대해서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관리들은 그들이 통제하기 어려운 종족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청 말년에 객가가 중심이 되어서 태평천국의 난을 생각한다면 이런 위기 의식이 단순히 과정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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