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22. 08:30 - 독거노인

<18세기 중국사회>


청을 건국한 만주족은 명의 시대적 유물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한족의 지배자로 등극하였지만, 한족이 가지고 있던 문화와 체계를 수용하고 변형하면서 그 뿌리를 이어간 것이다. 이런 변혁과 수용속에서 만주족으로 구성된 팔기군이 최고의 귀족계층으로 등극한것은 당연한 조치였을 것이다. 청제국을 건설한 그들에게 주요 공신으로 귀족자리를 꿰찰 수 있도록 했으며, 한족을 탄압하고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팔기군이 최고 상층을 차지하였지만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조금씩 한인 문화속으로 흡수되고 권력적 특권에서 밀려났으며, 영구 세습되는 권력 기반은 아니었다. 


청정부가 한족을 지배했지만 그 지배 과정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강격책과 유화책을 동시에 적용하여, 한족의 지식 계층을 흡수하였다. 덕분에 명말 지배계층이었던 신사층들은 그대로 청제국으로 흡수 병합되었고, 그들의 권력과 권리를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남 지역에서는 지역 신사층의 세금에 대한 반발로 군사적 힘을 동원하여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세원 확보를 위한 안정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지역 신사들의 기반은 토지에 있었고 세수 징수의 기반도 토지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해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청정부는 건국초기 청정부 비용 감당을 위해서 세수확보가 급박했고 강남의 신사층들은 복명에 대한 열망과 자기 이익의 결합으로 청에 저항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이 주목하고 있는 18세기는 청제국의 안정적 기반이 확립된 이후에 번영으로 시기를 구가하던 시기를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명대부터 점차적으로 발전하던 상업과 통신, 운송은 이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발전속에서 경제는 번영을 이루었고, 게다가 대외 무역을 통한 은의 꾸준한 유입은 분명 청경제를 끌어당기는 완만한 인플레이션을 유도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스페인이 개발한 멕시코의 은광 그리고 일본으로부터의 은 유입을 통해서 부의 축척과 이동이 용이해졌고, 그만큼 사회적 변동도 활발했을것으로 보인다. 부상들의 출현으로 상위계층들은 긴장했고, 그들은 상업적 부에 의해서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으며,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유행을 주도했다. 물론 그런 유행이나 문화는 출판의 호황으로 그 지식체계를 알리는 데 일조했고 하위 계층이 이를 수용하고 따라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유행이라 시간이 흐르면서 꾸준히 변하고 그 추세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고가품과 사치품의 상당한 소비를 촉진할 수 박에 없었을 것이다.


부의 축적이 영향을 미친 또 다른 분야가 학문적 분야였다. 강남의 상업적 성공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이 자식들을 위한 물질적 기반을 마련해주고 정계진출을 위한 학문적 투자에 힘쓰자 그들은 청대에 많은 관료 배출을 독점할 수 있었다. 이는 다시 학연, 지연등이 중요시 되던 인맥으로 이루어진 청대의 관료층에 넓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관료로 진출하기 위해서 관직을 매입하거나 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그들 동향의 관료들 수를 늘릴수 있게 만든다. 


관료로 진출할려는 많은 학위 소지자들이 관료로 진출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이 가진 학문적 소양에 좌절하고 현실에 대한 비관적으로 바라보았으며, 그들의 좌절은 다른 방향으로 시각을 전환하게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고전에 대한 언어학적인 고증이 유행하고 지적 탐구에 몰두하여 청대에 주류 학문이었던 주자학과는 대비되는 양명학이 번성하게 된다. 이는 재정적 지원이 가능했던 이들의 도움으로 번성하게 되었고, 청 황제 또한 책편찬과 연구를 장려한다.


18세기의 청은 그들 제국 구축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19세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몰락을 길을 걷게 된다. 번영을 구가하던 청제국이 외국에 의해서 강제 개방되고 경제는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는 과정은 무엇 때문에 촉발 되었을까. 책에서는 여러 원인을 분석하고 있지만 딱히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영국과 무역 관계에서 흑자에서 적자로 전환하면서 은의 유출로 불황이 시작되었을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청은 이미 세계경제 속에서 반영과 몰락을 경험하고 있었고 그들은 나름데로 완고한 시스템을 잘 운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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