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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4. 1. 08:30 - 독거노인

<바다의 실크로드>


동남아의 해양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권은 말라카를 주축으로 중국과 인도차이나 그리고 멀리 인도, 지중해까지 연결되는 기나긴 항로였다. 이는 천산남로나 천산북로로 불리던 실크로드보다 더 많은 재화와 상품을 한번에 교역할 수 있고, 험난한 산맥지역과 사막 지역을 통과해야하는 위험도 훨씬 적은 교역루트였다. 덕분에 말라카에는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그들만의 촌락을 이루고 끊임없는 부와 재력을 축적할 수 있었던 곳이다. 말라카라는 곳이 생산되는 식량과 교역할만한 상품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삼각무역을 통한 자신들만의 생존 전략이 넓은 관용과 더불어 부를 가져온 것이다. 


중국은 명나라때 해금정책으로 일시적인 쇠퇴기를 거치기 전까지 해상무역의 거대한 시장이었다. 특히 환관 정화의 6번에 걸친 해외원정으로 그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데올러지적으로는 중화사상에 기초하여 중국황제의 위용을 과시하고 타국에 황제의 시혜를 베푼다는 생각으로 떠난 원정이지만, 조직된 거대한 선단과 물량면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수준이었다 한다. 중요한 것은 사료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화는 당시 아랍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중국 장안에 거주하던 많은 외국인들중에서 환관이 되어 중국 황제의 권력을 과시하는 사절단을 이끈 것이다. 이 원정은 인도를 거쳐서 아프리카까지 도착하였다고 하니 당시의 항해 기술이 서양에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중국은 해류를 이용한 해로를 이미 숙지하고 개척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아랍과 한반도와의 연결은 아랍쪽 문서들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아직도 다량의 문서가 존재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런 문서들을 기초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많은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실제 이들의 영향을 볼 수 있는 설화나 조각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개방적인 모습은 조선초 강제적인 동화 과정을 거쳐서 사라져 버렸고, 쇄국정책으로 인해서 더 이상 우리의 기억속에 사라진 모습이 되었다. 


서양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기전은 암흑의 시기였다. 북유럽의 기나긴 겨울을 보내기 위해서 고기를 보전하고 음식들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향신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동양과 아랍의 지식이 넘어가고 향료가 전해지게 됨으로써 귀족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 사치품이 되었다. 이는 아시아에서 건너간 화약과 나침판, 천문, 수학 덕분에 그들은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항해의 시대를 열수 있었던 것이다. 문화의 교류를 통해서 습득된 지식과 문화가 침략을 위한 발판이 된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특히 포루투칼의 향료 무역을 위한 식민지 개척 이후, 서구 열강들의 동양을 향한 침략은 그 후 몇세기 동안 깊은 상흔을 남기게 된다. 인도는 수많은 제후들이 서로 견제와 전략적 이유 때문에 침략에 협력하기도 하고 적대적 투쟁을 거치지만 결국 영국의 거대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인도의 고아, 코친은 아랍 상인들을 대상으로 향료 무역을 하며 막대한 이익을 올리는 향로 수출의 원천국이었고, 영국이 산업혁명을 통해서 값싼 옷감을 수출하여 인도의 전통적인 섬유사업을 괴멸 시키기 전까지 자체적으로 발전시킨 옷감과 염료 사업이 발달한 나라였다. 인도의 옷감이 영국에 수출되어 영국 섬유산업에 위협적을 가하자 수입 금지 정책을 취하고 자국의 섬유사업을 발전시킨 것은 영국이 인도에 진 빚중에서 가장 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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