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가 생각하는 유형원은 전남의 외진곳에서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글을 쓰는 외로운 유학자를 상상하는 일이다. 당시의 조선은 고을의 관원과 향리의 부패로 인해 나타나는 인민들의 희생뿐만 아니라 굳건한 왕조를 세우려 했던 조선 건국의 의지와는 멀어져 있는 많은 문제들이 노출되어 있는 허약한 모습이었다. <반계수록>은 유형원이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불합리하고 잘못된 점들을 개혁하려는 의지에서 지어진 책이기 때문에 다루는 분야가 매우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이런 개혁의 필요성이 왜 대두되었으며 조선 사회 전후반에 걸쳐서 그 영향이 어떻게 들어났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매우 광범위한 연구 결과를 들어내고 있다. 조선 사회는 고려 전통의 연약한 국왕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이성계에 의한 반란으로 고려 시대를 끝내고 강력한 왕권 확립을 세울려는 의지에 의해서 개창되었지만, 근본적인 문반 중심의 핵심 권력 세력들은 조선이 개창된 후에도 여전히 유효한 권력층에 머물고 있었으며, 노비를 소유하고 대토지를 보유한 유력한 집권층이었다. 이와 연장선상에서 조선시대를 판단한다면, 고려시대의 사회적 속성이던 노비 기반대농장 운영이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본적으로 사회 구성원의 1/3 노비였던 조선 개창기는 권력 기반에 있던 문반들이 많은 토지를 점유했을게 분명하다. 이런 노비들은 18세기에 혁파되기까지 조선의 주요한 노동력이었고 착취 대상이었을 것이다. 유형원은 이런 노비제도에 불합리성을 인정하면서 혁파를 주장하지만 당장 모든 노비들을 혁파할 수 없다는 전제를 단다. 이는 양반들이 새로운 환경에 익숙하지 않으며 노비들로부터 제공 받는 노동력들이 갑자기 없어지게 되면 이에 적응할 수 없으므로 현재의 노비제를 유지하면서 시간을 두고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노비의 세습도 인정하는데, 현재의 종부법에서 종모법으로 바꿔서 유지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노비제도는 유형원이 주장한 균전제와 맞물려 있다. 노비들이 해방되고 균전제가 시행되면 노비였던 이들에게도 공평한 농지 분배를 주장한다. 이에 따라서 좀 더 공평한 주대의 이상향에 가까워지고 모든 양민들은 그 땅에서 생산하는 생산물을 기반으로 조세를 납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노비도 군대에 편이되어 군역을 납부해야된다고 주장한다. 임진왜란 이후 노비도 군대에 편입되면서 군복무 인원이 늘었는데, 유형원 여기서도 자신의 한계를 들어낸다. 모든 양인과 노비 그리고 관직으로 나가지 못한 유생은 군역을 지지만 이들을 같이 복무시키지 않고 신분에 따라서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형원은 노비 혁파와 같은 면에서 조선시대 문인들보다 혁신성을 보이지만 결국 그의 유교적 교리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분제도의 유지와 양반 존재에 대해서 긍정(오히려 적극적 옹호자처럼 보이기도 한다)을 한다. 유형원이 생각하는 양반 혹은 유생은 관직(국가를 위한 봉사자로서)을 위한 상부계층이다. 국가 관료를 등용하는데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는 과거제도의 정형화에서 벗어나 좀 더 도덕적으로 숭고하고 깨끗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학교를 세우고 여기서 수학을 시키며 덕과 지식을 겸비한 인재 양성을 힘쓰며 왕은 이들을 고라서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찌보면 나이브하면서 가장 유교적 교리를 잘 반영한 인재 등용 방식일 것이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왕을 보필할 것이며 백성들을 위해서 유교적 교리에 따라서 충실하게 지배력을 수행할 것이다.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서 군역을 진다는 것은 수치로 여기며 이를 거부한 대부분의 양반들과 권력층은 군역을 회피했으며, 수많은 세금과 향반 그리고 관리들로부터 수탈의 대상이었던 양인들은 뇌물을 통해 이런 억업으로부터 면제되거나 유망했으며,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이들은 유망을 선택했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조선의 독립성은 그 허약한 체질에 비해서 운이 좋을정도로 잘 유지되었다. 이는 명나라와 청의 도움으로 군사적 체계의 붕괴속에서도 속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하며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군사 시스템을 개혁해야된다는 자각은 분명했지만, 당파 싸움 때문에 주요 군사직은 하나의 권력투쟁의 장이었다. 왕은 군사 개혁을 통해서 영토 보전보다는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반란의 위협 때문에 자리 보전을 위해서 수도권 중심의 군사집중을 요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호란을 겪으면서 너무나 쉽게 청의 군사력 앞에 무너질 수 밖에 없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왕은 전쟁이 발생할 시 북쪽에 방어선 구축을 통해서 전방 항전이 아니라 강화도나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통해서 항전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들어났듯이 지방의 군사체제는 이미 붕괴되어 있어서 실질적으로 군에 복무할 양인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왜군과 항전하기 위해서 소집된 군인들도 명령체계가 확립되지 않아서 중앙에서 파견된 군관이 도착해서 실질적인 통솔권을 행사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유형원이 살던 시기 이미 상업의 발달이 가속화되기 시작했으며, 18세기 접어들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이는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조선의 봉건적 요소이며, 향후 자본주의적 맹아 단계였다고 판단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상업적 발전이 과연 물질적 기반에 있어서 생산력 증가와 잉여 물질의 증가에 따른 귀결인지는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인구증가와 증가된 생산량은 상업발전에 투입되기에는 부족했을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 나타난 어떤 증거도 생산량 증가가 그 잉여를 투자할 만큼 충분하다는 증거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며, 오히려 인구 증가를 가신히 메꿀수 있을 정도 아닐까 추측하게 한다는 것이다. 산출량 증가에 기반한 상업적 활동의 증가보다는 방납을 대동법으로 대체함으로써 음지에 있던 활동을 양지로 끌어들이고 시스템이 고착화되면서 이에 기생하게 되는 부류들이 늘어나면서 가능해진 상황일 것이다. 상업의 증가는 동전 수요를 증가 시켰고, 유형원이 살던 시대에는 이미 동전 통화량을 늘리기 위한 시도들이 있었다. 유형원도 이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도 통화량 증가에 지지를 보낸다. 하지만 그의 통화량 조절에 대한 기초는 주대에도 이미 동전이 등장했으므로 조선에서 동전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통화량 증가를 위한 주조가 정체되어 있다가 영조때 어쩔수 없는 압력에 못이겨 주조를 허락 한다. 이후 통화량 조절을 위한 시도들은 정체된다. 결국 고액통화의 등장은 대원군 때에 등장하지만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통화에 대한 강한 요구와 신하들의 수용은 있었지만, 현대적 관점에 바라볼 때 통화량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조선이라는 하나의 국한된 영역만을 탐구하면 분명히 들어나는 약점들을 극복하고 하나의 커다란 영역으로 확장된, 동아시아의 유교문화속에서 형성하려고 노력했던 범문화적인 속성 안에 존재하는 상상적 투쟁으로 봐야한다고 이야기 한다 - 역사속에서 항상 소국으로 살아온 이들이 가지는 컴플렉스적 민족주의자들에게 과연 이런 광의의 문화적 통합이라는 의미가 먹힐 수 있겠는가. 이런 전체적인 시각에서 조선을 바라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작가는 좀 더 좁은 시각으로 조선을 들여다보면서 이중적 태도를 보여준다.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당시 조선은 이미 헤어날 수 없는 부정과 타락의 징조들이 보였다는 것이다. 당쟁과 사화, 당파적 싸움으로 소모되어 버린 국력은 이미 회복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견해에 동조적일 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존재하는 노예제도와 집적된 대농장 소유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이런것을 외부적 충격에 의해서 혁파하고 새로운 국가가 탄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난 생각된다. 이런 생각들에 맞물려서 유형원의 저작이 가지는 혁신성이 과연 민족주의적인 주체적 시각에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인가도 의구심이 들게 한다. 이 부분이 중요한 관점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18세기 경세학자들이 가지는 시각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선의 나약한 국왕체제안에서 점점 타락해가는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새로운 혁신을 주장했지만, 그 한계는 뚜렷히 보이기 때문이다. 유교적 교리안에 갇혀 있는 그들이 시각이 과연 민족적 역량을 고려하고 조선 제도들이 가지는 한계를 혁파하려는 의지인지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그 혁신적인 시각들은 결국 성리학의 원리안에서 가지는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향은 결국 주대의 모습이 한계이며 그 이상을 벗어나기 위한 민족적 자각은 분명 부족하게 보였을 것이다. 분명 저자가 비판하는 내용들이 한국 사학계의 주류에서는 벗어난 이야기들이 많다고 하지만 내가 읽고 이해하기에는 새겨들어야할 부분이 더 많은 것 같다. 민족성과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에 맞춰서 증거들과 역사적 사실들을 해석하는 것도 위험한 일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비판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점들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나와디의 아이들> (0) | 2013.10.10 |
---|---|
<아웃 오브 아프리카> (0) | 2013.09.30 |
<사화와 반정의 시대> (0) | 2013.09.06 |
오즈 야스지로 (0) | 2013.09.05 |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0) | 2013.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