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2014. 3. 28. 09:00 - 독거노인

<고문서를 통해서 본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 >


일반적으로 양반이라는 단어는 고려말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문헌에 나온다. 분명 권력층이나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의 지위를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지만 그 정의 자체는 애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개창기 지방에 양반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는 연원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조선이 개창되면서 권력층에서 밀려난 이들이 지방으로 이주해서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는 설명도 모호하기는 마찮가지다. 분명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핵심 권력층, 즉 중앙의 문벌 세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지방에 정착하기 시작한 양반들도 고려시대 형성되어 엘리트 계층으로 인식된 이들이 지방에 농장을 개간하고 확장하면서 정착하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은 우반동 김씨가가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떨어진 곳에 농지를 매입하고 개간 작업을 하면서 농장을 확장하자 우반동으로 세거지를 정하고 이주한 사실에서 미약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닐까 생각된다.


우반동 김씨가의 내력에 나타나듯이 재력면에서는 영.정조 때에 최고의 상태에 이른다. 그런 재산 상태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조선초 김씨가의 선조들이 적극적인 농지 개척을 통해서 농장을 확대했음 남아 있는 문서를 알 수 있다. 처음 우반동에 토지 매입으로 그 기반을 마련하였지만 매입 후에는 적극적인 수리시설 확충과 황무지 개간 작업을 통해서였다.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노동력이 필요했을텐데, 김씨가가 가진 노비들을 통해서 이런 작업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초기에 개간 작업을 통해서 확보된 농지에 대한 양반들의 소유권이 약했던 것은 아무래도 실질적인 개간 작업을 노비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했으며, 그 농지에 대한 농사일도 노비들이 담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농지 확보 작업은 임진왜란 때문에 잠시 중단되고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김씨가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우반동에 확보된 토지를 포기하고 원래 기거하던 곳으로 돌아간다. 임진왜란 이후에 이런 토지들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고 다시 농사를 짓기 위해서 관아에 재산권을 요구한 김씨가의 문서를 보건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유권이 불확실해진 농지들이 꽤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반동 김씨가가 자리를 잡으면서 동성의 집성촌 형성이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동성의 집단촌을 형성하면서 그들의 지위를 통한 향촌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고 양반가와의 혼맥을 통해서 그들의 사회적 기반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우반동의 김씨가는 집안이 꾸준한 관직 진출에 성공했지만 결코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해서 명문세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교류했던 다른 양반가와 역모 사건등에 엮임으로써 신분상의 하자를 보였다. 이런 약점 때문에 좋은 집안과의 혼사를 성사 시키기 쉽지 않았으며, 관직 등용에도 많은 제약을 받아야했다. 


동성의 집성촌이 형성되자 봉제사를 위해서 장손에게 재산 상속이 우선적으로 돌아간다. 이는 동성촌 형성과 함께 자녀들이 멀리 출가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시댁으로 들어가 사는 경향이 강해졌기 때문에 발생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한다. 특히 평균분배의 원칙이 지켜지던 조선 중기까지 제사는 윤행이 일상적이었지만 멀리 떨어져 살게되면 이런 윤행이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경제적 측면에서 조선 후기로 가면서 소농화 경향이 뚜렷해진다. 결국 전세대가 축적한 거대 농장과 노비들이 있다하더라도 많은 자신들이 균등분배를 가지게 되면 재산의 축소화가 일어나 소농화가 촉진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요인이 강하게 작용했는지 모르겠지만, 김씨 일가는 17세기에 이미 장자 상속의 원칙을 분재기에 남기고 있다. 이유는 봉제사를 윤행하지 말고 장자가 지내며 이를 위해서 균등분배보다는 더 많은 재산을 남자 형제들에게 남긴다는 내용이다. 


조선 사회가 계급사회이며 양반이라는 신분층만이 엘리트 계층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그 양반이라는 신분속에도 차별이 존재했다. 이런 계층내 차별속에서 새로이 도전하는 양반계층이 급격히 늘었다고는 하지만, 18세기 신분제 해체를 맞이하면서 모호한 양반이라는 신분에 도전하는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하지만, 실제 양반의 정체성에는 쉽게 흔들릴수 없는 확고한 혈통에 대한 집념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김씨가가 받은 끊임없는 견제 속에서 잘 나타난다. 아마 이런 신분상의 혼란은 양반가의 상층보다는 노비들의 해방으로 인해서 급속히 늘어난 양인들에게 많이 발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노비들은 그동안 성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해방되면서 자신들만의 혈족을 강조하는 양반들이 가지는 동족에 대한 의식이 심화되고 이에 따라 선영봉사와 같은 의식을 흡수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감으로써 일반 양인들과 새로이 등장한 자유민과의 불협화음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스프로 프레스  (0) 2014.04.06
벚꽃 엔딩  (0) 2014.04.04
<작은 것들의 신>  (0) 2014.03.26
2014년 3월 23일  (0) 2014.03.24
<맛질의 농민들>  (0) 2014.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