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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21. 09:00 - 독거노인

<맛질의 농민들>


책의 제목은 맛질의 농민들이지만 실상은 대저리의 박씨家에서 남긴 일기를 분석하여 19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조선말부터 근대에까지 양반가에서 일어났던 대소사를 분석한 논문들이다. 박씨가는 대저리에 정착하면서 대지주로 성장하였다가 19세기말에 자신들의 재산이 축소되는 과정을 거치는 전형적인 조선 향반가의 일상을 보여준다. 박씨 가문이 정착한 대저리는 수원이 풍부하여 가뭄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논농사를 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 곳이다. 


박씨가는 기본 상품 거래를 위해서 가까운 시장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동네 주민들로부터 서비스와 재화 구입을 자주 하였다. 박씨가 스스로 강을 이용해 운반된 소금을 판매 목적으로 구매했던 기록도 보인다. 이를 기반으로 19세기 대저리에서는 빈농일지라도 여러가지 잡일을 하여 생계 유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직업과 상품의 분화된 모습이 나온다. 이런 상품 구매와 서비스 매매를 본다면, 조선조 초기까지 존재하던 호혜적인 선물 교환체제에서 시장 기반으로 한 거래가 발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에 발전된 시장이나 상품 거래는 그 분화정도가 고도화 되기에는 아주 미미한 발달 초기로 보아야 한다. 재화 자체도 가공 정도가 낮은 수준에서 머물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시장의 발달로 시장에 편입되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거래 품목이나 금액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 이런 증가 추세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기반의 시장 시스템으로 전환되기에는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오면서 이런 거래 일수와 주기가 점차로 짧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오며 이는 시장의 활성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농업은 19세기에는 극심한 자연재해와 농민반란 등으로 농촌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있었다. 대저리도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향촌처럼 농업이 주 생산 기반이었으며 이런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세기 동안 자연재해와 전염병 때문에 조선초와 같은 인구증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추측으로는 인구가 일정 수준으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구수의 증가와는 무관하게 19세가 말이되면서 미곡의 가격이 급격히 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미곡가의 상승 원인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 책에서는 신분제의 급격한 해체를 기반으로 노동력 해체에 있다고 보고 있다. 민란의 발생, 향반의 권위 위축으로 원거리 농경지 관리가 어려워지고 노동력 동원 자체에 한계가 들어난 것이다. 이는 일고나 년고등으로 고용 살이들의 사보타주나 태업 등이 자주 나타나고, 지주들은 원경지 농업을 줄이고 근경지를 자작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경향에서 이런 추세를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과연 신분제의 와해가 얼마나 생산성에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런 부분은 계량화가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분명 보의 수리나 년고나 일고의 노동력 부족으로 이앙을 제때 못하는 문제는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순수 농업적 측면에서 조선 후기로 가면서 상업작물 재배와 고집적 농업, 이에 따른 지력약화 등으로 파악될 수 있는 생산력 감퇴 부분이 크게 작용했다는 부분이 생략됨으로써 어느 한쪽의 해석으로 절대적인 생산력 감소 부분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특히 상업작물 재배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이런 부분에 신분제 와해로 인한 노동력 부족 부분이 더해진다면 유의미한 수준의 문제가 들어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대저리 박씨가에서도 면화, 옷감, 담배 구매가 일상적인 부분이었으므로 이런 작물들의 재배는 일반 소농들에게 커다란 수입원(좁은 경작지에서 얻을 수 있는 )이었을 것이다.


노동력 부족 부분에 더해서 조선후기에 대두되는 문제가 소농화다. 박씨가와 같은 대지주들이 점점 축소되고 소농들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소농의 증가는 대토지 경영으로 고집적, 고효율의 생산 시스템이 저효율, 저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신분제 와해의 다른 측면인 작인들의 빈번한 교체로 토지 지력의 급격한 감소 부분도 있을 수 있다 - 실제 박씨가에서는 태업이나 사보타주 고공에 대해서 작인을 교체하고 싶어했지만 대체 인력 투입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일기가 나온다. 이런 상호 작용으로 19세기 말에는 분명한 농업 생산성 감소로 미곡가의 상대적 상승이 존재했을 것이지만 어느 요인이 주요했다고 판단하기는 힘든 부분인 것이다.


신분제 와해는 18세기 노예제가 완화되면서 일반민중 뿐만 아니라 성이 없던 노예 계층들이 스스로 성을 부여(이는 단일 가족이 아닌 양반들이 누리던 남성 중심 친족 영역의 결속 강화를 받아 들인 것이다)하고 양반들의 이데올러지 영역이었던 봉제사기를 흡수하면서 널리 퍼진다. 신분제 와해 속에서 향반과 하층민들의 결속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부분이 다양한 계를 통해서 표출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향촌의 결속계는 그 주도 세력이 향반들이었음이 나온다. 즉, 그들의 권위를 기반으로 향촌을 이끌어 나가는 지배 권력층이었다. 그들은 향촌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주요 권력자들이었고 하민들은 그들의 권력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향촌 권력 관계가 완성된 것은 18세기 유교화가 일반 계층까지 내려가면서였고, 대저리에서도 19세기에 이런 권력 관계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책의 논문에는 없지만 이런 경향이 근경지에 대한 관리와 향반 세력들의 지주권 강화 측면에서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하민들을 상대로 이인계를 결성함으로써 그 지위를 공고히 하고 토지 지배력을 일층 강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체되어 가던 상하 구분 신분제는 권위적인 관료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일제 관리체제로 대체 되는데, 대저리에서도 일반 계에 하민들이 편입되고 있는것이 그 주요 특징이다. 하민일지라도 재산이나 지주로서 기반이 있는 이들은 기존의 향반들과 동등한 의사 결정 역활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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