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2014. 3. 10. 09:30 - 독거노인

<진랍풍토기>


내 기억속의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만이 존재한다. 1990년대말 내전이 끝나자마자 태국 국경을 통해서 넘어갔던 캄보디아의 모습은 두려움과 낯설움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제대로 갖추어진 대중교통도 없어서 국경에서 앙코르와트가 있는 곳까지 트럭 뒤에 타고 현지인들과 하루 온종일을 달려서 도착하던 곳이었다. 그 트럭으로 달리던 길은 아직도 내전중인것처럼 포탄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서 물을 담고 있었고 곳곳에 등장하는 군인들은 그들의 삶을 위해서 총을 들고 통행세를 받았다. 그들은 정규 군인이라기보다는 평상시 자신이 먹을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기를 잡다가 트럭이 지나가면 산적으로 변하듯이 길위에 나타나는 존재였다. 


어렵게 도착한 앙코르와트는 그 뜨거움과 폭발할 것 같은 밀림의 울창함에도 불구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모두들 자신이 어떤 유적지위에 서 있는지 모르는 것만 같았다. 그 시절 나는 캄보디아의 삶 속으로 그리고 밀림 속으로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아직도 길 위에는 어디에 있는지 누가 심었는지 모르는 지뢰가 곳곳에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관광객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기 보다는 그저 낯선 이방인으로 그들의 삶에 던져진 진기한 물건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삶은 외부의 세계가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만 같았다. 그런 이들의 삶이 13세기 중국인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주달관은 관료였던 아닌것으로 비춰진다. 중국에서 캄보디아로 파견되는 사진단의 일원으로 같이 갔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달관의 눈에는 인도차이나 반도가 얼마나 낯설게 보였을까. 지금도 열대 우림속에 존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천년전의 왠지 변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그대로 이어온 것만 같이 느껴진다. 아마 식민지 통치를 거치고 폴포트의 학살을 거치면서 그들의 시간을 고스란히 잃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주달관이 보던 그 시절 그대로 박제되어 버린게 아닐까 나만의 상상을 해 본다. 분명 그 시절에도 무역의 이익 때문에 많은 중국인 화교들이 캄보디아에 들어가 살고 있었음이 기록에 남아 있다. 


주달관이 본 캄보디아는 실제 캄보디아의 왕실 속에 깊이 들어갔다기 보다 - 주달관에게는 왕궁안을 둘러 볼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 같다. 단지 왕국의 겉모습만을 기록하고 있다-는 서민속에 깊숙히 들어가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들은 관료들과 평민들의 삶을 분명하게 계급적으로 구분한 것 같고, 우리가 알고 있는 앙코르와트의 거대 건축물이 힌두교 양식에 맞춰서 건축되었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곳곳에 불교의 흔적이 남게 되었는데, 주달관이 볼 때 이미 불교의 영향이 깊숙히 침투한 이후의 모습이다. 


일만 민중들은 초가집에 거주했으며, 돼지 싸움을 즐겼고, 약용으로 인간 담즙을 채집했다. 이들의 삶에서 승려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듯 하다. 승려를 통한 처녀막 제거 의식 - 이는 티벳 불교에서도 볼 수 있다 -은 하나의 커다란 축제와도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계절마다, 특정 기간마다 축제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주달관이 전부 후술할 수 없을 정도였다면 - 그의 기억 때문인지, 너무 많은 축제들이 존재한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 분명 많은 축제들을 즐기며 살았을 것이다. 일년 삼모작이 가능한 열대 기후에서 그들에게 풍부한 것은 쌀이었고, 부족한 것은 직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직물 능력이 많이 떨어져 태국 사람들이 들어와 직물 직조를 했고, 인도의 실크가 고위 관료들이 선호하는 옷감이었다는 것으로 나온다. 이미 그때에 인도, 인도차이나, 중국까지 이어지는 무역로는 완성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맛질의 농민들>  (0) 2014.03.21
<그들의 바다>  (0) 2014.03.17
<이재난고로 보는 조선 지식인의 생활사>  (0) 2014.03.07
<느린 희망>  (2) 2014.03.03
<존버거의 글로 쓴 사진>  (3) 2014.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