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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7. 09:00 - 독거노인

<이재난고로 보는 조선 지식인의 생활사>


평생동안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한 모든 것을 기록한 황윤석의 <이재난고>를 분석한 책이다. 그는 눈감기 몇일전까지 일기를 남겼으며, 개인적인 감정에서부터 자신이 생각하고 보고 들은 것들 전부 기록하였다. 여기에 그 자신의 의견에 배치되더라도 그 사실들을 무시하거나 경시하지 않고 일기에 그대로 남겼다. 덕분에 조선후기 문인의 삶속에 녹아 있는 생활상과 의식의 흐름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책이다. 


이재는 영정조 시대의 탕평책을 기반으로 당파싸움을 최대한 줄이려 노력하는 조선의 중흥기를 산 유림이다. 영정조 치세 기간동안 기존의 당파 편향성을 억누르려 했지만 실질적으로 당파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더 분열되는 양상속에서 영정조가 단순히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재 또한 그 분열된 당파 중에 낙론에 속하는 유림이었다. 그가 학문으로 명성을 얻음으로써 음서를 통해서 낮은 관료 직급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가 유림이었지만 18세기 급증하는 학문적 지식적 발전에 따라서 박학에 평생 치중했다. 그의 박학에 실학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를 실학자로 보기도 하지만 실제 그의 학문은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그외에 다양한 관심사들에 연구를 거듭했다. 특히 중국으로 급속히 유입되고 있던 천문에 관심이 많아서 천문적 지식과 그 기반이 되는 수학을 깊이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농경 생활에 있어서 계절의 변화와 절기의 변화가 중요한 만큼 그 기반이 되는 학문에 대한 관심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로 가면 서북지방 과거 급제자가 급격히 늘어난다. 황윤석의 글에 나타나는 서북지방 과거 급제자에 대한 소문은 과장에서 글을 사 과거에 급제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서북지방 출신자들의 정계 진출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이들에 대한 지투로 인해서 떠도는 소문인지 아니면 실제 그런 부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진출이 많아졌는지는 의문이다. 황윤석 자신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고 평생 과거에 메달려 장원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제도에 대한 연민과 부정적 시각이 공존하는 것 같다. 그의 일기에 등장하는 영,정조 시기의 과거제도는 이미 부패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급제자가 그을 사는 것 뿐만 아니라 과거 시험을 치르는 장소에서 관리 수준이 현저히 약화되고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는게 보인다. 이런 사실을 기반으로 본다면 서울 지역의 급제가 중심이 되고 서북지역 급제가가 증가한 이면에는 분명 경제력을 기반으로 부정 행위를 통한 급제가가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이런 급제자의 증가율이 어느정도인지는 알 수 없을 뿐이다.


<이재난고> 안에는 이재의 개인 경제생활을 추적할 수 있는 내용들이 다수 존재한다. 유학자로서 경제적 관념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재의 부친이 돌아가시고 관직에서 파직당한 후에 재산 관리에 힘쓰면서 그의 경제 관념은 늘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이재의 기록에는 당시의 물가 상황을 추측할 수 있고 지역별로 물가와 물품의 가격이 상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 교통의 발전이 미비했던 시절에 같은 쌀의 가격도 지역마다 편차가 심한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지역 격차는 물품이 원활이 공급되기 힘들고 정보의 부족으로 인하여 이재가 관직에 있을 때 물품 구입을 청탁 받는 내용에서 잘 유추할 수 있다. 당시 상황에서 물품이 서울로 모여들었으므로 서울이 그나마 물품 구입에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영조는 통화발행에 있어서 보수적이었으며 통화 억제를 하고자 하다 결국 시장의 압력에 굴복하고 주화 제조를 허락하였다. 이재 자신도 젊은 시절 동전 유통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입장에서 말년에는 통화를 허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하지만 그가 적극적인 통화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실생활에 깊숙히 침투한 동전의 사용은 그의 관념적 경제 개념속에조차 동전이 필수 요소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가 과거를 보기 위해서 상경하는 과정에서 노자돈을 얼마를 챙겨야 하고 그의 비용이 얼마나 발생하는지가 그의 일기에 잘 나와 있다. 그가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말과 노비가 필요했고 그들의 잠자리와 먹을 것을 해결하는 비용까지 챙겨야 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 동전 유통이 확장되고 활발했지만, 이런 동전의 유통이 가지는 한계는 동전을 주조해서 그 동전을 운반할 때 발생하는 비용을 계산함으로써 알 수 있다. 개인적인 소규모 거래에서는 동전이 큰 부담이 안되지만 대량의 금액이 오고 가거나 국가에 동전으로 납부하는 세금같은 경우는 동전 자체 수송에 부담을 느낄 정도였고 운송 속도도 현저하게 낮았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 이런 결점을 보완하자면 금융업이 발달하여 지역간 거래에 어음이나 금융서비스를 수행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어야 한다. 이런 기능을 어느정도 원시적 수준에서 수행하던 개성상인이 있었던 것은 이재의 글에 나온다. 하지만 금융 업무 보다는 그들의 물품 수송이나 상인들의 왕래를 통해서 편지를 주고 받는 정도였다. 


조선 시대 관직 진출은 儒者로서 그 가문의 영광의 영광이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도 부의 축적과 확장을 위해서 좋은 기반을 제공했다. 한 집안에서 과거에 급제하기 위한 투자를 본다면, 이재의 경우 부친이 천석지기였지만 아들 둘에게 모두 과거를 보도록 지원하기 수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재만이 학문적으로 집중 투자되었으며, 둘째 아들은 재산관리에 충실했다.


이재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음서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낮은 직급이지만 수령으로 승급되면서 경제적으로 혜택을 보기 시작한다. 물론 그의 벼슬이 위로 올라가면서 그 혜택을 누리게 되지만 첫 관직에 임용되었을 때 말단 관직에서는 그가 받는 녹봉만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어서 집안의 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어렵게 살아야 할 정도였다. 


조선전기에는 개인간 선물의 빈번한 교환으로 경제 생활에 많은 부분을 보충했지만, 이재가 관리로 부임한 후기에는 이런 관례적인 선물의 교환이 급격히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장경제의 발전으로 어느 정도 시장의 힘에 의지해서 필요한 것들이 해결 가능해졌고, 정부의 체계화된 관리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어서 관청의 자원을 개인적 수취하거나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이런 진전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관념위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관직에 나아간 관료들이 가례에 따른 비용 지출은 용인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재가 제사를 지내는 비용이나 가족들을 자신이 부임한 지역에 데리고 와서 같이 사는 비용등은 그의 관아에서 지출이 되고, 이런 것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이재는 관직에 있는 동안 부의 증진을 위해서 어느정도 노력을 했다. 특히 논을 구입하기 위해서 집으로 송금을 하기도 했다. 조선의 관리들은 그들이 관직에 머무는 동안 친분, 관료로서의 힘 등을 이용해서 재산 증진을 위해서 노력했고, 대농장의 지주로 등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재는 선친에게 물려받은 500석지기에서 머물렀으며 유학자로서 적극적인 농장경영에 관심은 두지 않은 것 같다. 


조선후기에 대동법이 도입되면서 정부가 좀 더 시스템적으로 세금 수입을 관리하고자 하였지만, 현대적인 개념의 정밀한 관리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각 현단위 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이방이나 아문들은 기본 급료가 없었기 때문에 세금 징수나 송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 등을 중간 착복함으로써 그들의 생계를 유지한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향촌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수령이나 현감을 보조했기 때문에 분명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그 정보를 기반으로 이익을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재가 부임하자 이방이 그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세결을 보고 받고 이재 자신이 그것을 사적 용도로 사용한 것을 보면 이런 관리에서 누락된 세원들이 많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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