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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17. 09:00 - 독거노인

<그들의 바다>


중국 청 시대에 중국은 광할한 영토를 지배했지만, 실질적으로 드넓은 바다에 대해서는 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초원을 활보하던 청왕조에게 바다란 그저 시야에 보이는 곳은 가까운 바다로 인식하고 시야를 벗어나는 곳은 곳 대양이 되는 인식적 한계에 머물게 했으며, 해금 조치를 통해서 바다에 대한 제어 자체를 포기해 버렸다. 이런 해금 조치로 무역의 급감을 초래했지만, 드 넓은 공간을 다 관할 할 수 없었으며 밀무역이 성행했다. 18세기의 서양은 중국으로부터 많은 걸 수입하고 있었고 중국 자체도 외부 세계로부터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은으로 인한 지속적 통화팽창과 약한 인플레를 통해서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 책은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까지 활동하는 중국 해적들의 이야기를 추적한다. 낭만과 잔인함이 공존하는 바다의 이야기는 왜 그들이 바다의 해적이 되었으며 그들의 최전성기에 올라선 순간에 그렇게 쉽게 해체되었는지를 추적하려 한다. 


해적들의 발원지가 된 곳은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장핑이 해적들의 주 활동 무대가 되었다. 연해에 섬들이 많고 실제 약탈 후 손쉽게 추적을 피해서 도피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주 활동 무대로 삼기 좋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인도차이나와 중국을 잇는 무역로서 많은 물동량이 오가는 뱃길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좋은 물적 기반을 제공했다. 


중국의 동남부 지역은 많은 민족들이 혼합되어서 제한된 자원에 대한 경쟁을 벌이던 곳이었다. 특히 종족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단일 종족으로서 외부로부터 방어와 공격을 위한 종계가 형성되고 마을 방어 뿐만 아니라 혈전이 벌어지는 종족간 계투가 존재 했다. 육지에서 밀려난 이들 중에는 바다를 생활 터전으로 잡고 배위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되었다. 이들은 물로기를 잡아서 -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기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  이를 교환수단으로 필요한 생필품을 구했기 때문에 선주가 되거나 물주가 되지 않는 한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따라서 바다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어업에 종사할 수 없는 기간에는 쉽게 해적으로 변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해적들은 배를 공격하여 물자를 탈취하고 배에 있던 선원들을 협박하여 해적이 되게 만드는 과정을 거쳐서 자신들의 세를 불렸다. 해적 단원 모집은 친인척(정이 같은 경우 집안이 해적 집안이었다)들을 섭외하거나 혹은 더 이상 동원할 친척들이 없을 때는 납포한 혹은 납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적에 가입하도록 종요했다. 이들이 해적이 되도록 하는 회유책에는 선물이나 금품 댓가 혹은 동성애 등이 이용되었다. 하지만 이런 해적들은 산발적이며 소규모로 활동하였다. 


베트남에서는 떠이 썬 장군의 반란이 일어났고 그 위세를 떨치며 베트남 북쪽을 차지하고 왕으로 등극한 그는 필요한 해군을 마련하기 위해서 해적들에게 정식으로 관작을 주고 해적질을 위한 공개적 승인과 장소를 마련해주었다. 떠이 썬은 자신이 갖추지 못한 해군을 중국과 베트남 해적들을 고용하여 그들에게 작위를 주고 해군으로 활동하도록 독려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에 고무되어 합법적인 약탈과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때 활약하던 이들이 조직적인 체계를 갖출 수 있는 능력을 배웠고 19세기로 넘어오면서 러이 썬의 멸망 이후 분열되어 있던 해적들이 규합되고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었다.


해적들은 카리스마 있는 정이를 주축으로 6방을 형성했지만, 갑자스레 정이가 죽자 정이의 부인이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수장이 된다. 정이싸오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이 해줄 의붓아들 장바오를 자신의 남편으로 맞아들인다. 장바오는 자신의 해적의 잔인한 이미지보다는 절도 있고 절제된 리더로써의 모습을 보여준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해적 6방 연합체는 견고한 조직력을 기반으로 광둥에 자리 잡고 그들의 세력을 급속히 확산 시킬수 있었다. 우리가 상상하듯 해적들은 풍기가 물란하고 비열하며 잔인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기록상에 남아 있는 그들은 자신들이 약속한 것을 지켰고, 자신들이 싸워야하는 대상들에게만 잔인하게 행동한 것으로 나온다. 특히, 장바오는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였다고 묘사되고 있다. 그는 포로들에게 잔인하지 않았고 자신들에게 보호비를 상납하는 자들과 통행료를 내는 자들에게 약속을 지켰고, 이를 어기는 자신들의 일당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르게 했다. 약탈물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축척을 하고 약탈자들에게 그 댓가를 공정하게 분배함으로써 해적들간의 기강을 유지했다. 


해적들이 동남부의 연안을 자신들의 구역으로 확정하고 넓혀감으로써 청조의 관료들과 황제는 골머리를 앓게 된다. 실질적으로 해적들에 대한 소탕 작전을 수행할 만한 해군 능력이 없었고, 능력있는 관리가 임명되었지만 부실한 해군력과 숫적으로도 열세인 병력을 동원해서 그들을 소탕할 수는 없었다. 오직 해안 방어와 일시적인 시위 정도가 전부였다. 이런 빈한한 대처에 황제는 당황한 것으로 보이고 그에 대해 짜증을 냈던 것 같다. 


해적들의 위세가 날로 커짐으로써 중국과의 무역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영국이나 포루투칼이 이에 관여하려고 했다. 이때 중국과의 무역 이익이 컸으므로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중국에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제안한 것 같다. 그렇지만 중국의 황제 입장에서는 서양 오랑케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어내는 것 자체가 중화민족의 자손심을 건드리는 문제였다. 하지만 중국 해군이 열세에 몰리자 결국 포루투칼의 힘을 빌린다. 포루투칼이 참여함으로써 극적 반전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 그들조차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해적들의 활동에는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못한다.  


결국 청조가 해적 문제를 해결한 계기는 해적들에게 투항을 유도함으로써 그들에게 댓가를 지불하고 해적질에 대한 사면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 자체는 중국의 오랜 전통으로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이나 혹은 제어하기 힘든 상대를 회유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었다. 이런 전통을 해적들에게도 적용하고 해적들이 퉁항하기를 종용한 것이다. 이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여 결국 해적들의 6인방은 해체되고 투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최절정기에 있던 해적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힘을 포기하고 투항하게 되었을까는 아직도 의문이다. 분명 내부의 알력 싸움이나 권력의 분열이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의 힘은 아직 건재한 상태였었다. 


청조의 인민에서 해적으로 변신하던 이들은 다양한 요건 - 경제적 어려움, 종족 분쟁에서 밀려난 이들, 범죄자, 해적의 설득 등 - 들에 의해서 하나의 집단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어떤 정체성으로 분류하기에는 모호하다. 특히 반청 세력으로써 분류할 수 있는지 자체가 의문이고 이들의 결속을 유지시켜준 것은 분명 경제적 요인, 물질적 요인이 가장 컸다고 봐야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어느 누군가의 배신으로 청조에 투항하자 급속히 분열되고 장바오와 정이싸오도 투항함으로써 한 시대의 막을 내렸다. 이들의 투항으로 청조의 바다는 조용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청조 해군의 문제점과 바다에서의 청조 권력 작용은 깊은 심연 속에 묻히고 만 것이다. 청조는 단순히 해적들을 회유하여 그들의 약탈과 침략질을 잠재우자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고 더 이상의 문제점들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다. 결국 청조의 외부에 대한 대응 능력은 이로써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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