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가 제주도에서 상 소식을 듣고 급히 배를 타고 돌아가다 표류함으로써 최부의 여정은 시작된다. 당시 조선의 배를 생각한다면 바람이나 물길의 영향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적었다고 하겠다. 최부가 표류하면서 뱃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보아도 제주도에서 남자들의 반이상이 바닷길에서 죽은 것으로 유명하고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들이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 할 정도였다 한다. 그만큼 하늘의 뜻에 따라서 살아 남아 중국의 남쪽에 이른 것은 천운이라 할 수 있겠다.
최부가 표류할 당시 명은 해금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고, 최부 일행을 왜구로 오인하고 그들을 붙잡아 신문하는 절차를 거친다. 물론 조선인으로 판명되고 이를 통해서 조선으로 귀송조치가 가능해졌다. 그만큼 중국을 통일한 명의 입장에서는 넓어진 국경들을 관리하느라 실질적인 바다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해금조치로 인한 일본과의 무역 단절은 일본 무역을 하던 이들에게 커다란 타격이었을 것이고 사무역이 성행하게 된 배경이기도 한데, 왜구란 단지 일본 해적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무역에 종사하던 이들과 해금정책으로 인한 생계가 불투명해진 중국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하겠다. 따라서 최부 일행이 중국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해적을 만난 것은 이들에 해당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부가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기억력으로 이것을 재구성한 글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학식이나 지위를 본다면 비범한 사람이었음에는 분명하다(과거에 2번 합격 했다 한다). 그의 박학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그가 북경으로 호송되어 가면서 중국의 산천과 강의 이름들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에 놀란 명조 관원이 어찌 잘 아는지에 대해 물으니 중국지도를 보고 배웠다하는 걸 봐서는 그의 박학함과 재능을 엿볼 수 있다.
명과 조선은 유교를 숭상했지만, <표해록>에 나와 있는 모습을 보면 서로 상이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수로를 따라서 등장하는 수많은 사당들이 존재하고 관우를 모시는 사당도 등장한다. 수로 여행중 명의 관리들은 배가 무사히 북경에 도달할 수 있도록 운을 비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최부에게도 같이 절을 하라고 종용하지만 최부는 유교의 원리에 따라서 자연에 대한 제사는 오직 황제만이 가능하므로 자신은 절을 할 수 없다는 선비로소의 절개를 보인다. 이는 중국이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실질적으로 민간에서는 다양한 신들이 존재했고 불교도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교적 이데올러지를 철저히 따르던 조선이 유교적 교리의 정통적인 질서를 더 잘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중국 기행록으로써 <표해록>이나 <열하일기>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서로 씌여진 시기가 상이하고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책에 등장하는 내용도 완연히 틀리다. 최부의 입장에서는 여행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표류 후에 북경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지식을 동원해서 지나는 길에 있는 각 지역의 특징과 유명한 일화와 지명을 소개한다. 이에 반해서 <열하일기>는 사신의 행렬을 따라감으로써 주위에 많은 관료들과 지식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기 때문에 중국의 지역적 특성이나 풍물보다는 오히려 지식인들과의 교류가 주를 이룬다. 이 지식의 교류속에서 반청 감정이나 한인들의 사상같은 것이 들어난다.
<표해록>이나 <열하일기>의 일상적인 부분들을 들여다보면 옷과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두 책이 쓰여진 시기가 명대와 청대이니 그만큼의 간극이 크고 중국은 문화적 경제적 격변이 있던 시기여서 의상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조선은 어느정도 변화가 있겠으나 명대를 따른 복식은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청대의 지식인(한인)들은 조선의 풍습 유지형태에 대해서 은근한 부러움을 들어내기도 하는 것은 명대에 대한 그리움과 만주족에 의한 지배에 대한 반감이 상호작용한 것 같다. 하지만 <표해록>에 기록하고 있듯이 상업이 번성한 강남 지역 복식의 화려함을 기술한 것을 보면 그들의 물질적 풍요와 함께 사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면이다. 그만큼 명청시대 강남지역은 물류가 풍부하고 그들의 재력을 과시할 수 있는 사치함이 많이 존재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음식 부분은 분명 서로 주고 받은 부분이 기술되지만 음식을 어떻게 가공하고 어떻게 먹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저자들이 직접 음식을 조리하지 않고 단지 아랫것들이 차리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조리나 가공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표해록>에 등장하는 국수 한쟁반, 돼지 고기 한접시를 받았다는 식의 표현을 보면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과연 요리를 해서 준것인지 재료를 그대로 준것인지, 만약 재료 형태로 받았다면 조리를 하기 위한 조미료나 가공은 어떤 식으로 처리했을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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