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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30. 09:00 - 독거노인

<근대의 맛과 공간의 탄생>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시기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도 모호한 문제이다. 주체적으로 근대가 이식된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강제로 이식된 근대는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논쟁적 시기 구분에 대해서 접근하기 보다는 학계에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견해를 따르고 있다. 즉, 근대 시기 구분에 대한 논의는 개항 이후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근대의 개념은 새로운 문화의 유입으로 사람들의 생활 양식이 전통적 방식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중시 한다.


"일제가 도입한 근대적 제도들은 서구의 제도들이 일본에서 조금씩 변형되어 한국에 강제된 것이지만 이를 제도는 일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서구적인 것 또는 근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김영정 外


근대 주체의 문제는 주체 내부의 관습, 종교, 네트워크 등의 생활과 문화, 사상과 의식 속에서 내적 계기를 발견하기 어렵고 경험, 생활, 행위 등을 포괄하는 다양한 생활사 연구를 통해서 발견해야 한다. 근대를 소비하는 방식의 문제는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식민지 수탈론, 식민지 근대화론의 모순적 대결이 이어지고 있다. 근대에 대한 물음과 연결해서 식민지 수탈론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의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이성당(李盛堂)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번성하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해방 후 일본인이 떠난 빈 공간에서 행위 주체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역사적 공간에서 일본인들은 조선으로 들어오는 근대의 매개체 역활을 했다. 일본인들도 근대화를 완전히 체득한 후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서서히 그 과정에 동화되고 흡수되어 근대에 대한 소비의 주체로 변화되었으며 이를 조선에 적용한 것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근대화를 먼저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들이었기에 조선인에게 근대화를 전달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근대화라는 것은 일본인들에게도 바로 개념과 이념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를 '이즈모야'의 빵가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즈모야'를 처음 시작할 때 일본 전통과자로부터 서서히 제빵으로 확장해 나아간 것은 근대의 주체로서 서구의 문명과 물질적 혜택을 흡수하고 동화하는 과정과 시간이 일본인들에게도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떠난 빈 자리는 조선인들이 채우고 그 공간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일본이 이식한 근대는 부정적이며 지워져야하는 대상으로 보았음을 이즈모야가 겪은 수난에서 알 수 있다. 이즈모야가 떠나고 난 후 이성당이 그 자리를 불하 받았을 때 이즈모야가 운영하던 제빵용 기구나 살림살이, 가구들은 모두 사라지고 빈 가옥만 남아 있었다. 이는 이즈모야의 사람들이 간신히 몸만 챙겨서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조선인들은 그들을 부정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들이 소유할 수 없었던 근대적 물질을 약탈하기 위해서 그 기물들을 파괴나 약탈했을 것이다(이는 명확하게 들어난 부분이 없다). 결국 조선의 근대화 과정은 일본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이식되었던 혹은 인위적 체득의 과정을 거쳤던 해방 후 그 부분들은 부정되고 지워져야 할 대상으로 인식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성당에서 빵을 만들어낸 과정은 이즈모야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기술 전수를 받아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깨 넘어로 눈으로 봐 두었던 것을 이성당이 들어선 이후에 스스로 연구를 통해서 재현 해 낸 것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근대적 소비에 적극적으로 조선인들을 끌여들였다기 보다는 조선을 타자화하고 소외 시켰음을 의미하며 해방 후에 이어진 조선의 근대화는 불연속적 혹은 분절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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