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2017. 3. 8. 09:00 - 독거노인

<중국 음식 문화사>


"사람이라면 누구나 음식을 먹지 않는 이가 없지만 능히 그 맛을 아는 자가 드물다" - 중용


중국의 곡주 제조 기술은 농업 시대가 도래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명되었다. 신석기 초기의 일이다. 곡물로 술을 빚는 일은 과실주를 만드는 일처럼 쉽지 않다. 왜냐하면 곡물과 효모군이 직접 작용하여 술을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분은 반드시 가수 분해를 거쳐야만 맥아당 혹은 포도당으로 변한다. 이는 당화를 거친 후에야 알코올 발효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누룩으로 술을 빚었다는 것은 중국의 위대한 발명이다. 이 발명은 세계 각지의 다른 고대 문명지에서 유행했던 양조 기술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인 게이뤼삭이 중국의 누룩으로부터 주정을 생산해 냈다. 즉, 당화 능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주화 작용을 일으키는 매균 균주를 누룩에서 분리해 알코올을 생산했다. 이 방법은 맥아를 당화제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유럽 고유의 술 발효 제조법을 완전히 개선 시키는 계기가 됐다.


"제사는 본래 인간이 신령에게 뇌물을 주는 일종의 수단이다" - 쿼바오쥔 「중국청동시대」


공자의 예는 식생활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식생활의 변화에 따라서 예 역시 변했다. 주나라 때에 "식이요법"과 "식이보충" 그리고 음식의 금기에 대한 인식은 이미 상당한 깊이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옛사람들은 오미(五味)가 사람의 혀에 직접적인 감각을 줄 뿐 아니라 아울러 피부와 육체에도 중요한 조절 작용을 한다고 보았다. 이는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사치와 검소를 막론하고 위진남북조의 난세에서 이것들은 모두 극단적인 현상이었다. 마음껏 향락만을 즐기는 사람들은 인생이 짧은 것을 한탄하였고, 즐거움을 누릴 때는 모든 것을 잊고 아무런 꺼리낌도 없었다. 그러나 독실한 불교 신자들은 인자한 마음을 품기 위해서 소식금욕하며 사치를 삼갔다. 장수를 원하는 사람들은 노장의 도를 숭상하며,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적은 상태인 청심과욕을 강조하면서 세상사를 멀리했다. 인색하고 재산을 아끼는 사람은 많은 돈을 쓰지 않고 한푼이라도 아끼려 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난세에 상류층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사치를 부렸던 만큼 음식기술과 문화 발달을 가져왔고 후대에 알려진 많은 미식가들을 배출했다.


적잖은 명절이 유구한 세월을 거쳐 형성되었고, 대부분 남북조 시대 이전에 이미 풍속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남북조 시대는 이들 세시 풍속을 집대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들어와 명절은 그 체계를 비교적 완벽하게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유지되었던 한곳의 지역적 특징이 뚜렷한 명절도 다른 지역에서 받아들여졌다. 이로 인해 남방과 북방의 경계가 점점 사라졌다. 명절에는 일반 민중들이 평소에 국과 채소로 이루어진 반찬이 전부였던 음식 생활에서 벗어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당나라 때 서역에서 들어온 가장 중요한 음식은 자당(설탕)이었다. 동시에 설탕을 만드는 방법도 들어왔는 데, 자당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된 일은 중국 음식에 존재했던 감미료를 아우르는 성과였다. 당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음식은 배를 불리기 위한 욕구의 해결 수단이었으며, 동시에 많이 먹는 것이 가장 좋은 원칙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음식 먹는 방식에 다양화를 모색하는 다양한 시도가 행해졌다.


당나라 사람들은 송나라 사람들과 마찮가지로 차와 술을 즐겼다. 「다경」에 최초로 차의 기원과 재배, 제조, 음용에 대한 기록을 집대성하였다. 당나라 이전까지는 바닥에 앉아 1인분 식사를 하도록 상을 받았으나(분찬), 당나라 때부터 발이 달린 높은 의자와 식탁이 도입되었다(회식). 5~6세기 때 북방민족 문화를 흡수,발전시킨 결과라고 보여진다.


북송이 멸망한 후, 금나라 사람들은 여러차례 변량에서 수천명씩 예인을 모집했다. 그 중에는 음식 조리의 고수들도 적지 않았고 이 사람들이 중원의 음식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북방으로 갔다. 많은 음식 고수들은 송나라 조정이 남쪽으로 옮겨갈 때 그들을 따라 새로운 도읍지 임안(항저우)로 갔다. 이로 인해 남방에서는 중원의 조리 기술을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였다. 이로써 남방과 북방의 음식 문화 교류가 촉진되었다.


대체로 당나라 말기부터 시작하여 식이요법과 관련된 일부 저작에서 한가지 음식으로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기존의 방식에 대해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래서 복합 처방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 새로운 의료체계의 하나인 약선(藥膳)이 출현했다. 약과 음식의 결합은 식료학을 하나의 새로운 발전 단계로 나아가게 했다.


음식의 금기, 성질, 치료 효과는 상당히 오래된 학문이다. 각종 음식이 지닌 성질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가 끊이지 않고 보태지고 깊어지면서, 그 내용 역시 풍부해졌고 더욱 더 방대해지고 복잡해졌다. 이런 학문은 통치자들을 중요하게 여겼고,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는 무신경했다. 실제로 이러한 학문이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이유는 통치자들의 필요에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역자의 말처럼 저자는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어 보는 시각 자체가 편향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단점을 가지고도 이 책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중국의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 속 음식들을 총체적으로 집대성하였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거의 생소한 음식 이름들(번역하는 저자조차 생소한 음식이름이 많이 등장한다고 한다)이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이 현재의 중국 음식속에서 살아 숨쉬는 조미료가 되어 살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음식 문화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통치자들과 상류층의 사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이는 서양의 음식문화에서도 마찮가지다)다. 현대는 과거에 평민들이 맛볼 수 없었던 다양한 음식 재료들에 대해서 싼 값에 접근이 가능한 혜택을 주었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만들어줬다. 그 풍요 속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들을 음미하면서 먹고 마시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도의 여행자들>  (1) 2017.04.03
<지적자본론>  (1) 2017.03.20
<뷰티풀 라이프>  (1) 2017.03.06
<당신만 몰랐던 국제금융 이야기>  (0) 2017.03.02
<음식 인문학>  (0) 2017.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