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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3. 09:00 - 독거노인

<에도의 여행자들>


다 지지 말아라 아카호의 싸리꽃이여,
추억을 찾아 다시 찾아올테니
-― 나카가와 부인

『해와 달은 백년과객이며 오고 가는 해(年) 또한 나그네다. 뱃전에 생애를 띄우며 말고삐를 붙잡은 채 늙그막에 접어든 사람은 날마다 여행길이며, 여행길이 내 집이다. 옛 사람도 여행길에서 생애의 막을 내렸다. 나도 언젠가부터 조각 구름에 이끌려 방랑 생활을 동경해 마지 않았다』 -― 오쿠노 호소미치 서문


에도 시대 여행을 하려면 통행증이 필요했는데, 목적 없이 통행증을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관광 여행을 하는 경우 대부분 사원 참배 명목으로 통행증을 얻었다. 에도 시대는 단체 여행을 주관하는 고(講)가 성행하여, 여행사가 주관하는 현대의 단체 여행과 같은 역활을 했다(통행증 발급, 식품 준비, 여행 도구 준비 등).


에도 시대에 사원 참배를 한다고 해도 농민이 고향을 떠나 여행길에 오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타지로 사원 참배길에 오르는 것은 농사 일손을 부족하게 하고 여비를 필요로 하므로' 바람직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사 계급도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다. 한쪽은 생산력의 원천인 토지에 묶여 있었고, 다른 한쪽은 에도 시대의 체제를 유지하는 주군에게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행각승, 이세, 오시, 광대, 행상인 등은 삶의 현장인 사람들로 비교적 자유롭게 전국 각지를 돌아 다녔으며, 상인 계층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농민들이 토지에 얽매여 있기는 했지만, 농한기에는 먹을 것을 싸들고 온천으로 치료 여행을 가기도 했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는 에도에 집과 가족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대를 이을 적자가 태어난 후에야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첫 여행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다이묘는 에도와 영지를 오가는 여행이 할 수 있는 여행의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영지와 에도를 오가기 위해서 길은 정비되었으며, 음식점과 숙박소가 들어섰다. 결국 이들 덕분에 에도를 여행하는 이들은 많은 혜택을 얻은 것이다.


에도 시대 가난한 이들은 관광지에서 토산품을 사거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고, 값싼 숙소에 조차 묵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도중에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농가의 헛간에서 잠을 자고 아무도 없는 사당에서 비를 피하였으며, 결국 사람들의 선의에 기대어 여행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에도 시대 가도를 오가는 여행자들 가운데는 이런 순례자나 히지리(聖者)처럼 여비 없이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런 여행자들에게 너그럽고 친절했다.


그나마 싸구려 숙소에 머물 수 있었던 이들은 불결한 환경과 열악한 환경을 견뎌야 했다. 많은 이들이 오갔기 때문에 이불은 눅눅하고 이가 들뜷는 경우가 많았다. 봄과 여름에는 식중독의 위험이 컸다.


에도 시대 상인이나 부농층은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취미 삼아 하이쿠나 문인화를 즐기며 우아하게 만년을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 거상들은 대부분 문화인이기도 했으며, 교양이 풍부하고, 문인 묵객들에게 행랑방을 내주며 지방 문화 살롱 역활을 한 것이다. 덕분에 전국을 여행하는 문인들은 이들의 호의를 받으며 여행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가짜 문인들이 많아서 그들의 호의를 받기 위해서는 시험을 거쳐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에도 중기를 넘어서면 여자들의 교육 수준이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여행을 떠나기도 비교적 쉬웠다. 그렇지만 그들이 통행증을 받기가 쉽지 않았고, 설사 통행증을 받았다고 해도 검문소를 자유롭게 통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검문소에서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금품을 뜯어내기 위해서 엄격한 검문을 하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여성 여행자들은 그런 검문소를 애둘러 가거나 새벽 일찍 검문소를 통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에도에 여행자들을 보면 그 당시의 중국 그리고 조선의 경향과 많은 비교가 되는 것 같다. 여행이란 결국 경제적 여유가 어느정도 뒷받침 되어야 가능한 것이고, 교통과 통신, 출판 등의 부수적 기능도 같이 발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경제적 발전은 명, 청 시대를 거치면서 중흥의 시기를 맞이하던 중국 같은 경우가 아마 최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베이징에 수도를 정한 청제국 때문에 물류의 원할한 유통을 위해서 수로가 발전한 덕분에 상품과 사람의 이동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던 중국을 생각한다면 일본과 많은 비교가 된다. 일본은 대부분 가도를 통해서 도보로 여행을 했고, 여행 속도에 한계가 있었다는 점은 경제적 한계와도 비교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그 시대 가장 경제력이 뒤떨어지는 조선의 경우는 이동 속도에 더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이나 조선이나 지방의 유지들이 문인들을 맞이하고 그들을 접대한 것은 아마도 중앙에서 발전하고 있는 문화를 지방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만큼 여행자들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시대의 조류를 읽고 싶었던 욕망이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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